힘 세진 비서실장… 역대 대통령 비서실은

힘 세진 비서실장… 역대 대통령 비서실은

입력 2013-01-22 00:00
업데이트 2013-01-2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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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총애속 권부 2인자로 전횡하거나 권력암투끝 퇴장

‘권력의 꽃, 권부의 2인자, 내각 중의 내각’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다. 비서실장은 청와대 비서진의 최고 선임자이자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보좌하는 핵심 참모다.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을 모시다보니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동안 비서실장의 위상과 역할은 대통령의 통치철학과 용인술에 따라 매우 다른 양태를 보였다. 대통령의 총애 속에 실질적 2인자의 지위를 누린 이가 있는가 하면, 권부의 암투에 밀려 허울 뿐인 실장으로 전락한 인사들도 적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비서실 구상은 ‘작은 청와대’로 통한다. 내각에 힘을 싣는 ‘책임총리제ㆍ책임장관제’ 구현을 위해 비서실의 월권을 차단하고 대통령 보좌에 집중하는 구조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청와대 조직을 슬림화하는 과정에서 비서실장은 오히려 비서실 장악력이 높아지고 대통령 임명직 인사를 다루는 인사위원장까지 겸해 사실상 ‘왕(王) 실장’ 역할을 맡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박 당선인은 2인자를 인정하지 않고 측근정치를 혐오하는데다 비서실의 비대화와 권력화가 역대 정권의 쇠락을 자초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 새 정부의 비서실장이 위세를 부리기는 쉽지 않다는 전망도 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첫 비서실장은 김양천 전 경무대서장이다. 이기붕 전 부통령도 한때 비서실장을 맡아 ‘2인자’로서 위세를 떨쳤다.

1960년 윤보선 전 대통령이 옛 경무대를 청와대로 개칭한 이후 청와대 비서실장에 오른 인물은 초대 이재항씨를 시작으로 이명박정부의 대통령실장까지 포함해 모두 33명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기간에는 이동원, 이후락, 김정렴, 김계원 씨가 비서실장을 맡았다. 1963년 청와대에 입성한 이후락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 속에 청와대를 절대권력의 상징으로 만들며 비서실을 명실상부한 권부로 각인시켰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권력의 한 축이었던 그는 1969년 박 전 대통령 장기집권의 길을 연 3선개헌 국민투표 통과 후 퇴진했다.

후임 김정렴 비서실장은 1969년부터 무려 9년3개월이라는 최장수 비서실장 기록을 갖고 있다. 그는 스스로 탈정치를 표방하며 경제분야에 주력하는 처세술을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무ㆍ경제ㆍ공보수석을 동원해 정치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유신정권의 김계원 마지막 비서실장은 1979년 10ㆍ26 때 박 전 대통령 시해현장을 목격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10ㆍ26 이후 최규하 전 대통령은 외교관 출신인 최광수 비서실장을 기용했지만 신군부의 권력탈취 기도에 무기력했다.

전두환 정권 때는 김경원 이범석 함병춘 강경식 이규호 박영수 김윤환 등 7명이 비서실장으로 재임했다. 정권 초기 허화평 정무1수석, 허삼수 사정수석, 이학봉 민정수석 등 보안사대령 3인방과 허문도 정무1비서관 등 국보위 실세들이 권력의 전면에 부상해 비서실장은 의전적 역할에 머물렀다.

특히 정권 중반부부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장세동 경호실장이 기용되면서 나머지 비서실장 역시 권력의 핵심에 다가서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6공화국 비서실은 홍성철 노재봉 정해창 실장 체제로 이어졌다. 1990년 3월까지 홍 실장 체제가 비교적 보좌와 참모기능에 머물렀다면, 이후 노ㆍ정 체제는 권력의 중추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990년 3당합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선후보 선출 이후 힘이 빠지면서 임기말을 마무리짓는 역할로 제한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에서는 박관용 한승수 김광일 김용태 씨가 차례로 비서실장을 맡았다. 박관용 실장은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가 막후에서 국정에 개입하는 바람에 핵심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문민정부의 비서실을 권부로 인식하게 만든 계기는 비서실장이 아닌 1993년 12월 이원종 정무수석의 등장이다.

상도동 가신 출신으로 현철씨의 후견인이었던 이 수석은 정책결정과 공천 등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노동법 날치기 파동으로 김광일 비서실장과 알력을 빚다 97년 2월 동반퇴진했다. 김용태 실장이 뒤를 이었지만 외환위기, 대선 등과 맞물려 임기말 수습에 주력해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정부에서는 김중권 한광옥 이상주 전윤철 박지원 등 5명의 비서실장이 배출됐다. 김중권 실장은 6공의 마지막 정무수석이었지만 동서화합과 국민통합의 카드로 발탁된 케이스로, 이후 새천년민주당 대표까지 지냈다.

국민의정부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이는 박지원 비서실장이다. 그는 대통령 공보수석ㆍ정책기획수석ㆍ정책특보, 문화부 장관을 거치면서 당과 내각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중평이다. 김 전 대통령의 최대 역점 사업이던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에 나설 만큼 ‘복심’으로 통했다.

전윤철 비서실장은 재임기간이 2002년 1월29일부터 4월15일까지로 역대 최단명 기록을 갖고 있다. 후임 이상주 비서실장의 재임기간도 100일에 못미친다. 그러나 전 실장은 경제부총리, 이 실장은 교육부총리로 임명된 것이어서 ‘불명예 퇴진’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문희상 김우식 이병완 문재인 비서실장 체제다. 개혁을 표방한 참여정부 청와대는 노 전 대통령이 자주 논란의 전면에 등장하고 386 참모들이 득세해 비서실장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기보다는 보좌와 참모 성격이 강했다.

참여정부를 기점으로 대통령이 당의 제왕적 총재를 겸임했던 정당사가 종언을 고하면서 당청 간 정무적 기능이 강조되던 비서실장의 역할도 크게 변화했다. 자연스레 국정 전반을 좌우하거나 국정의 2인자로서 비서실장 이미지가 약화됐다.

가장 두각을 드러낸 이는 문재인 실장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변호사 동업자이자 인권변호사 동지였던 그는 2번의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정무특보를 거쳐 마지막 비서실장에 오를 정도로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특히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친노(친노무현) 진영을 대표할 대선 주자로 급부상했고 지난해 민주당의 후보로 선출될 만큼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다.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대선주자로 선출된 것은 문 실장이 처음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류우익 정정길 임태희 하금열 비서실장 체제로 대표된다.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는 정책조정의 기능을 중시하며 내각 장악력이 높았다는 평가가 많지만 비서실장이 전면에 나서진 않았다. 청와대 수석들이 최전선에서 드라이브를 걸었다면 비서실장은 상대적으로 대통령 보좌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였다. 과거에 비해 측근이나 가신이 비서실장에 나서지 않은 것도 특징이다.

류우익 실장은 이 대통령의 당선 이전부터 10년 이상 싱크탱크 원장을 맡아 초대 비서실장에 올랐지만 정권 초기 쇠고기 파동에 따른 촛불시위로 인해 4개월 만에 사퇴했다.

뒤이은 정정길 실장도 이명박정부의 중간선거 격이었던 2010년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뒤 여권에서 인적쇄신이 몰아치자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 정운찬 국무총리 등과 함께 물러났다.

임태희 실장은 ‘50대 젊은 청와대론’에 힘입어 비서실장에 임명됐고, 현정부의 고용부 장관을 지냈다. 그는 2011년 12월 청와대를 떠난 뒤 지난해 새누리당 대선 경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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