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바람따라 맛따라] 두물머리의 미명과 일출, 커피박물관

[길따라 바람따라 맛따라] 두물머리의 미명과 일출, 커피박물관

입력 2010-01-10 00:00
업데이트 2010-01-1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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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향기로 여는 새해 새아침 풍경들

겨울 사진/안시아

시린 겨울 하늘,

발자국이 느낌표로 찍혀 나온다

가늘게 휘어진 나무 가지 끝

잎새의 무게가 매달려 있다

오늘 지켜야 할 약속 때문에

외투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어느 간이역 편도행 열차에 오른다

포장마차는 밤이라는 경계를 오가며

긴 줄기마다 알전구를 피워 올린다

나무 한 그루 좌표를 긋는 하늘 아래,

어둠은 저녁의 불빛을 한데 끌어모아

미명을 맞는다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풍경들,

모두 지나간 것처럼 시간은

사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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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된 느티나무와 달
400년 된 느티나무와 달
속력은 어둠의 모서리를 부수며 빛을 향해 나아간다. 새롭게 시작하는 2010년의 새벽을 열기 위해 풍경들을 스쳐지나고 있다. 국도 한 켠에는 가장 먼저 아침을 서두르는 듯한 토스트 가게의 알전구가 등대처럼 불빛을 밝힌다. 시작은 늘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듯, 도로의 가로등도 지난 밤의 마지막 한기를 품은 채 풍경들을 비추며 새아침의 채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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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 전 붉은 그을음
일출 전 붉은 그을음
물안개 번져오르는 새벽안개와 일출이 유명한 양평의 두물머리를 찾았다. 일몰이 아쉬움의 여운이라면 일출은 희망이고 설레임일 것이다. 아침 창가로 그림자를 엎지르는 따스한 햇볕, 매번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풍경이라고 느끼며 살았을 뿐, 그 하루의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거나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본 적은 드물었던 것 같다.

일출하면 보통 장엄한 동해의 일출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서쪽에서 해가 뜬다는 서해의 일출도 낯설지 않은 것들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좀 더 색다르게 나룻배가 고즈넉한 배경이 되어 주는 강가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어떨까. 북한강과 남한강 두 물이 만나는 지점이라 뜻하여 ‘두물머리’라는 명칭을 얻은 나루터의 아침이 어둠 속에서 속력을 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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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박물관과 매표소인 빨간버스
커피박물관과 매표소인 빨간버스
맑은 날씨를 고대하다 보니 가장 매서운 한파가 몰아친 이른 새벽이었다. 깜깜한 어둠인데도 두물머리는 커피를 파는 간이찻집과 따끈한 어묵 행상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진촬영, 그리고 드라마, 광고 촬영지로도 유명한 탓에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 때문인지 이곳의 새벽은 일찌감치 분주해 보였다.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누군가의 삼각대가 벌써 건너편 능선을 향해 세워져 있었고 그 뒤편으로는 400년을 살았다는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동그란 달이 무늬처럼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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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의 미명
두물머리의 미명
그렇게 설레임 속에서 얼마나 지났을까. 향긋한 커피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어묵꼬치의 풍경이 더없이 따스할 무렵, 산고 같은 것이었을까. 드디어 수면에 비치는 능선 너머로 붉은 그리움 같은 색이 번지기 시작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능선 위로 보석 같은 해가 하늘을 열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보석은 채 5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을 마주하며 당당히 내 안 겹겹이 싸인 어둠을 빛으로 감싸안고 있었다.

여행은 답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문 하나 던지러 가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이런 풍경들과 맞닥뜨리면서 어떤 답을 찾기도 하고 때론 고백도 하면서 아름다운 취조를 당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좋은 질문 하나 던질 수 있는 것이 어떤 해답을 찾는 것보다 더 값지고 벅찬 일일 것이다.

어느새 푸른 미명의 나루터는 어둠의 꺼풀을 벗으며 점점 환해지고 있었다. 같은 사물과 같은 장소지만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이 시간을 평생 어떻게 설명하며 헤아릴 수 있을지. 그저 신비스러운 자연의 일부 앞에서 다시 사색하며 겸손해질 뿐이다. 느티나무 가지 사이 동그란 달을 마주한 채 태양은 그렇게 떠오르고 있다.

따스한 커피 한 잔이 절실했던 새벽녘 추위를 데리고 발길은 다음 여정인 인근 10분 거리의 커피박물관으로 향했다. 북한강을 바로 마주하고 있는 짙은 커피색같은 붉은 건물과 그 앞 매표소로 쓰이고 있는 빨간 버스는 이국적이면서 색다른 느낌이었다. 그러고보면 빨간색은 겨울을 가장 겨울답게 채색해 주는 색깔인 것 같다. 빨간 크리스마스 장식들, 산타의 빨간 모자, 리본 등등…. 박물관의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일출을 기다리느라 차가워졌던 몸이 조금씩 데워지는 것 같다. 평소 쉽게 접할 수 있는 커피라는 기호식품이어서 그런지 박물관의 테마가 다소 의아하게 느껴졌었는데, 직접 접한 커피의 역사는 꽤 진지하고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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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디의 전설’로 시작되는 커피의 역사 이야기는 대강 이렇다. 800년경 에티오피아 카파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사는 양치기 소년 칼디는 어느날 자신의 양들이 이름 모를 풀을 먹고는 흥분하여 뛰어놀고 밤에는 잠을 자지 않는 것을 목격한다. 호기심이 발동한 칼디도 그 열매를 먹고는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 열매를 따서 승려에게 보여주게 되는데, 그 승려 역시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승려와 칼디는 이 열매를 악마의 유혹으로 생각하고 불에 던져 태워버렸다. 그런데 잠시 후 열매가 불에 타면서 향기로운 냄새가 수도원을 감쌌고 그날 이후로 그 불에 타다 남은 열매는, 고된 고행으로 잠과 싸우던 승려들에게 구원의 음료라는 커피로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초기의 커피는 소수의 승려들을 통해서만 음용되어지다가 이슬람 세계와 유럽으로 점점 퍼져나갔다고 한다.

사실 나는 커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커피광도 아니다. 또한 커피를 마신다고 해서 기분이 상쾌해진다거나 혹은 잠이 오지 않는 체질도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원두커피보다는 자판기커피의 구수한 향이 좀더 익숙한, 커피 마니아들이 보면 촌스러운 스타일 중의 하나일지 모른다. 하지만 새해를 준비하는 시간 속에서 이 커피 한잔의 향기와 흥미로운 역사, 그리고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두물머리의 일출과 새해에 대한 사색을 한층 더 산뜻하고 윤기나게 해준다고 할까. 아마도 이곳 박물관을 통해 커피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처음으로 직접 원두를 갈아서 마셔본 그 느낌, 음악, 그리고 향기…. 2010년은 빛과 향기로 가득한 환하고 향긋한 시작이 될 것만 같다.

그렇게 한 해를 뒤로 하며 새해를 지나고 있다. 일출과 커피향기의 2010년은 경인년 범띠의 해이다. 나 역시 범띠여서 그런지 조금은 남다른 새해를 맞이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능선 너머 강가를 비추는 푸른 미명 앞에서 그저 매순간 좀더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고 싶다는 바람을 적어본다.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길 수 있다면 보석처럼 빛을 발하는 저 1월의 태양과 새로운 출발 앞에서 좀더 떳떳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뒷모습이란 가족이나 연인 간의 사랑일 수도 있겠고 각자 새해에 꼭 이루고 싶은 다양한 소망의 종류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시작은 늘 아름다운 뒷모습과 끝이 맞닿아야 할 것이다. 누구도 건너뛸 수 없는 눈부신 하루치의 보폭이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기울고 있다. 그러니 우리의 끝은 늘, 지금처럼 다시 시작인 것이다.

글·사진_ 안시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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