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현장] 중대재해처벌법의 문지기들/오경진 산업부 기자

[나와, 현장] 중대재해처벌법의 문지기들/오경진 산업부 기자

오경진 기자
오경진 기자
입력 2022-02-17 20:30
업데이트 2022-02-18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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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진 산업부 기자
오경진 산업부 기자
“들어갈 테면 그렇게 해봐. 다만 제일 말단에 불과한 나도 힘이 세다는 걸 명심하게. 문을 지날수록 더 강력한 문지기들이 있어. 나조차도 세 번째 문지기를 보면 견딜 수 없을 정도라니까.”

‘법’으로 들어가려는 시골 사람을 막아선 문지기는 이렇게 말한다. 금지에 주저하며 평생을 법 앞에서 서성인 그는 결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장편 ‘소송’에 삽입된 짧은 이야기 ‘법 앞에서’는 현대인의 허무한 악몽을 표상한다.

제정 전에도, 시행 후에도 한결같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연일 논란이다. 사업장에서 중대한 재해가 발생했을 때 ‘경영 책임자’를 처벌토록 했다. 칼의 끝이 책임자를 겨누니, 기업들도 바빠졌다. 안전을 전담할 조직을 갖추고 수백억 투자를 늘린다는 보도자료가 쏟아진다. 바뀌는 게 있으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사업을 대표하고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 이에 준하여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 중대재해법 2조에서 말하는 경영 책임자의 정의다. 핵심은 안전관리 예산·조직 등에 관한 ‘결정권’이다. 법은 “결정할 수 있는 자가 책임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정수 대신 꼼수. 기업은 책임 소재를 복잡하게 흩트리는 것으로 이에 응수한다. 별안간 신사업에 나서겠다며 멀쩡한 회사를 지주사 체제로 바꾼다. 회사의 안전 정책을 총괄할 최고안전책임자(CSO)를 내세워 전권을 맡기기도 한다. 이런 조치로 기업의 총수가 수사를 완벽하게 피할 수 있을지는 법조계에서도 갑론을박, 하지만 수세에 몰린 회장님으로서는 충분히 써볼 만한 카드다. 어떻게든 떠넘길 여지가 있으니 말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재계 관계자는 “CSO는 사실상 회장님을 지키는 ‘몸빵’”이라면서 “언제, 얼마만큼의 책임을 져야 할지 모르지만 일단 울며 겨자 먹기로 맡게 된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앞으로 두둑한 수임료를 챙길 대형 로펌이 복잡한 법의 승리자다. 이들은 벌써 고용노동부와 경찰의 전관을 비롯한 산업안전 전문가들의 진용을 갖추고 다급해진 회장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로 흘러갈 천문학적 금액이 진작 현장의 낡은 설비를 개선하는 데 쓰였다면, 아까운 목숨 하나쯤 더 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죽은 노동자의 부주의가 사고의 원인이었다는 현장 관리자, 작업을 지시한 적 없다고 발뺌하는 원청, 이들을 변호하는 대형 로펌 변호사들과 ‘회장님 몸빵’을 자처한 안전책임자. 중대재해법에는 이토록 ‘문지기’들이 많다. 삼표산업, 요진건설산업, 여천NCC. 할 일이 많아진 고용부는 과연 저 문지기들을 지나갈 수 있을까.
오경진 산업부 기자
2022-02-18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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