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행.학살·강제노역…눈물로 얼룩진 한센인 역사

폭행.학살·강제노역…눈물로 얼룩진 한센인 역사

입력 2013-07-18 00:00
업데이트 2013-07-1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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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1970년대까지 피해사건 진상조사 결과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폭행·학살·차별에 시달린 한센인의 피해사건이 3년간의 조사 끝에 밝혀졌다.

보건복지부와 한센인피해사건진상규명위원회가 18일 발표한 한센인 피해사건 진상조사에 따르면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약 6천462명의 한센인이 영문도 모른 채 폭행·살해당하거나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소록도에서 벌어진 ‘84인 학살사건’. 1945년 해방 직후 전남 고흥군 소록도 갱생원에서는 병원 운영권과 식량, 의약품을 확보하기 위해 의사, 직원, 원생 간의 다툼이 일어났고 환자와 다툼을 빚던 직원이 고흥치안대를 끌어들여 원생 84명을 학살했다.

큰 사건이지만 당시 정부와 언론은 침묵했고 56년이 지난 2001년에서야 84명이 화장·매몰된 현장을 발굴하고 2002년 추모비를 세웠다.

공권력에 의해 한센인이 단체로 총살을 당한 사건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목포경찰서 수색대는 1949년 9월 목포 형무소에서 탈옥사건이 일어나자 도망가던 죄수와 옷을 바꿔입은 무안 연동의 한센인촌의 환자를 무차별 사살했다.

수색대는 이어 동네 주민에게 구덩이를 파게 한 뒤 무안 연동에 살던 한센인 환자와 아이 등 40여명을 모두 구덩이에 넣고 총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1년 뒤인 1950년 경남 함안군 물문리에서는 한센인 30여명이 인민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쓰고 방위대, 경찰, 대한청년단에 의해 집단으로 총살과 생매장을 당하기도 했다.

강제노역에 동원되고도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일도 있었다. 1962~1964년 소록도병원의 한센인은 전남 고흥군 도양면 봉암반도와 풍양반도를 잇는 ‘오마도 간척사업’ 공사에 동원됐다. 이들은 사업이 완료되면 간척한 토지를 분양받기로 했으나, 간척사업은 중도에 보건사회부에서 전남도로 이관됐으며 한센인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이뤄지지 않았다.

학살이나 강제노역보다 만연했던 것은 대중의 편견 어린 시선이었다.

1963년 국립부평병원 원주분원 한센인 40여명이 병원의 승인 아래 양평 양수리에서 정착촌을 건설했지만 건설에 반대한 마을 주민에 의해 15~20채의 가옥을 모두 부서지는 일이 있었다.

또 한센인 정착마을 아이와 자신의 아이가 같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하려고 등교거부를 벌이고 이에 항의하는 한센인을 집단폭행을 하기도 했다.

의성 금성초등학교와 부산 용산초등학교의 한센인 자녀 취학 반대사건이 벌어지자 경찰이 출동했지만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고 정부는 해결책으로 임시방편에 불과한 분교 설치를 내놓았을 뿐이다.

복지부는 위의 사건을 포함한 총 17개의 한센인 피해사건을 확인하고 피해자 가운데 지원이 필요한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에게는 매월 15만원의 생활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나성웅 복지부 질병정책과장은 “이번 조사는 질병을 앓았다는 이유만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따돌림을 받은 한센인의 피해를 본격적으로 규명한 것”이라며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던 한센인의 명예회복을 국가가 나서서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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