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길 한평생]<11>사진·예술 이해선(李海善)

[외길 한평생]<11>사진·예술 이해선(李海善)

입력 2010-03-09 00:00
업데이트 2010-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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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됐다. 첩보용 기재를 가지고 있다 해서 작품활동까지 방해를 받던 사진작가들에게도 다시 자유가 주어졌다. 그러나 뒤이은 6·25동란은 또하나의 시련. 『20년 동안 모아 두었던 「필름」을 몽땅 내 손으로 불살라 버리고 「카메라」도 버려야 했던 악몽같은 시절이었다』고 이해선(李海善)옹은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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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빛 본 대한사연(大韓寫硏)

해방된지 한달만인 45년 9월, 일제(日帝)말기에 자진 해산했던 조선사진예술연구회를 대한사진예술연구회로 개칭, 감격스러운 재발족을 보았다.

『박영진, 김정래, 김조현씨 등 당시 서울과 지방에 있던 작가 50여명이 다시 뭉쳤어. 내가 초대 회장이 되어 55년까지 3차례나 계속 일을 맡았지. 창립 이듬해인 46년 11월 첫 사진공모전을 열었지. 우리 땅에서 우리 손으로 우리 전람회를 연 그 기쁨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

그러나 좌·우익의 싸움은 사진계에도 불어왔다. 좌익계의 사진작가들은 따로 모임을 만들어 대한사연(大韓寫硏)에서 떨어져 나갔다.

『정치적인 분야가 아니니까 싸움이 심하진 않았지만 공연히 좌익계서 싸움을 걸어오고 헐뜯곤 했지』

해방과 함께 들어온 미군 덕분에 사단(寫檀)은 충분한 재료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코댁(현 코닥)」사의 질 좋은 「필름」이며 인화지 등이 흘러나와 작품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카메라」만은 일정때 쓰던 기계들이 그대로 사용됐다. 오히려 우리나라에 온 미군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라이카」같은 기계들을 사가고는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국제「카메라」가 독일제「카메라」를 따를 수 없거든. 성능이나 정밀함, 수명 등 모두 독일제가 앞섰거든』

■지하실에 숨어 「필름」태워

6·25동란이 터졌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 30의2, 자택에서 미처 피난하지 못한 이(李)옹은 적군의 「탱크」소리를 들으며 마루 밑에 토굴을 파고 숨어야 했다.

『저들은 이미 모모가 사진 작가라는 걸 다 알고 내려와 검속을 시작하더군. 한번 붙잡히는 날이면 갈데없이 평양에 끌려가는 거지. 생각다 못해 20여년 작가생활을 하며 모아온 「필름」 수만장을 내 손으로 불태워 버리고 「카메라」도 땅에 묻어 버렸지』

이(李)옹은 그때를 회상하며 무척이나 아까워 한다. 이(李)옹이 특히 아까워 하는 것은 이(李)왕직박물관, 미술관 등에 재직하며 틈틈이 찍어 놓은 우리 고유의 미술품, 궁전들의 「필름」을 이때 태워 버린 것.

『「카메라」야 다시 사면 되지만 이 「필름」들이야 다시 구할 수가 있나? 수복된 뒤 다시 이런 사진들을 모으려고 부지런히 돌아다녔지만 벌써 일부는 파괴되고 또 바뀐 것도 있어 옛 멋을 되살리긴 힘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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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취직은 단한번


「카메라」를 매만지다 보니 이(李)옹은 취직이라 할만한 취직을 해 본 일이 없다. 해방 직후에도 이(李)왕직에 남아 47년까지 비원 안에 있는 선원각(역대 임금님의 어진(御眞)을 모셔 두고 제사 지내는 곳) 책임자로 있었으나 47년 이후엔 취직이라곤 해 본 일이 없다. 왕실의 종친으로 이(李)왕직에서 근무한 것을 취직으로 치더라도 이(李)옹은 평생 단한번 밖에 취직한 일이 없는 셈이다.

『내 평생 해 온 일이라곤 사단(寫檀)을 키우고 후배들을 지도하는 일 뿐이었지. 그리고 틈이 나면 「카메라」를 들고 나가 내 작품활동을 계속해 왔어』

우리나라 사단(寫檀)의 기초공사를 한 사람중의 하나라는 게 이(李)옹의 자랑이자 보람. 그러나 『아직껏 대표작이라고 내세울만한 작품이 없는 게 유감스럽다』고 겸양하기도 한다.

이(李)옹이 가장 기뻤던 것은 64년 제13회 때부터 국전에 사진부문이 생긴 것.

『사진예술을 예술의 한 분야로 정립시키기 위해 사단(寫檀)의 모든 사람들이 10여년 동안 벌여온 「캠페인」덕분이었지. 그때부터 우리도 예술부문의 적자(嫡子)로 기를 펴고 나다니게 됐어』

이(李)옹은 현재도 국전의 초대작가. 줄곧 심사위원을 맡아왔으며 지난해엔 사진부문 심사위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우리나이로 내년이면 고희(古稀·70세)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이(李)옹은 아직도 사단(寫檀)의 일이라면 남보다 먼저 발벗고 나선다. 그동안 계속 맡아오던 대한사협(大韓寫協)의 회장직은 올해 1월 안준천(安俊天)씨에게 물려 주고 자신은 명예회장으로 제2선에 물러나 있지만 의욕만은 20대 부럽지 않다.

『요즘은 지병인 신경통으로 다리를 잘 쓰지 못해 나다니지 못하지만 좀 나으면 또 사진 찍으러 나가야지』

지난 해까지 어디서 사진전이 있으면 빠지지 않고 작품을 출품해 온 이(李)옹이다. 72년 11월 신문회관 화랑에서 있은 제20회 대한사협전(大韓寫協展)에도 『장날』『잉어잡이』의 2개 작품을 출품했다.

일반 사진관에 맡겨 현상·인화를 할 수 없는 게 바로 예술 사진.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지고 손이 떨려 현상·인화를 제대로 못하게 된지가 10년 가까이 되지만 지금도 이(李)옹은 믿음직한 후배를 데리고 암실에 들어가 작업한다. 이런 이(李)옹인지라 매사에 빈 틈이 없고 작은 곳에까지 철저히 보살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

『요즘은 「컬러」가 많이 보급되어 「컬러」사진이 많지만 역시 무거운 맛이나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흑백쪽이 훨씬 낫다』는 이(李)옹이기도 하다.

『작품을 만지느라면 나이를 잊는』 이(李)옹이지만 지난해 11월 문화예술인의 날에 정부에서 주는 국민포장을 받으면서 『이젠 이런 상을 받을 나이가 되었구나』하고 느꼈다고. 사단(寫檀)에선 이(李)옹과 얼마 전 작고한 서순삼(徐淳三)씨, 그리고 현일영(玄一榮)씨, 박필호(朴弼浩)씨, 김광배(金光培)씨 등을 일러 『사단(寫檀)의 5로(老)』라고들 부른다.

[선데이서울 73년 3월 18일호 제6권 11호 통권 제 2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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