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기사의 뺑소니, 운행판독기는 알고 있었다

택시 기사의 뺑소니, 운행판독기는 알고 있었다

입력 2015-06-12 08:37
업데이트 2015-06-1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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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취한 행인 치어 사망…블랙박스 기록 지우고 은폐 시도

4월 2일 새벽 서울 강동구 천호동 주택가 골목길에서 한 중년 남성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는 112 신고가 접수됐다.

즉시 경찰과 119구급대가 출동해 인근 주민 A(60)씨를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숨졌다. 그의 몸에서는 술 냄새가 풍겼다.

강동경찰서는 검안 결과 목 부분에서 차량 바퀴 자국이 발견됐다는 점에서 뺑소니 사건으로 보고 교통범죄수사팀을 투입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결과 A씨는 시속 15㎞ 정도로 저속 운행하는 차량의 바퀴에 머리를 밟혔다는 소견이 나왔다.

A씨는 술에 취해 길가에 쓰러져 있다가 골목을 지나가던 차량에 치여 숨졌을 개연성이 컸다.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CCTV는 사각지대에 설치돼 정확한 사고 장면이 찍히진 않았지만, 사고가 난 것으로 추정된 시간대에 지나간 차량 다섯대가 수사선상에 올랐다.

탐문 수사를 통해 용의 차량은 최종 두 대로 좁혀졌고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 ‘거짓말’ 반응이 나온 개인택시 기사 차모(65)씨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차씨는 사고 닷새 뒤인 4월 7일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한 자동차 수리업체를 찾아 택시의 블랙박스 기록을 포맷하고 메모리 칩을 버린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차씨는 “블랙박스가 잘 작동하지 않아 수리한 것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고 버텼다.

메모리 칩을 찾아 나선 경찰은 상도동 업체 주변 길바닥을 훑으며 버려진 메모리 칩 50여개를 주워와 천호동 뒷골목의 흔적을 쫓았다.

그러다 한 메모리 칩에서 지워지다 만 천호동 거리의 모습이 발견됐다. 수사팀은 즉시 이를 국과수로 보내 복원했다.

영상에는 차씨의 택시가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길가에 누워있는 A씨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왔다.

수집된 증거들은 차씨의 택시가 뒷길 안쪽에 승객을 내려주고 돌아 나오는 과정에서 길가에 주차된 차량을 피하려고 차량을 살짝 틀다가 왼쪽 뒷바퀴로 A씨를 친 것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택시가 골목으로 들어갈 때 A씨를 지나간 장면 이후부터는 복원되지 않아 메모리칩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했다.

그러자 차씨는 “사람이 누워 있지만 그냥 지나갔을 뿐, 그 사람을 치지는 않았다”고 다시 범행을 부인했다.

경찰은 현장에 차씨를 대동하고 사고 당시를 재현했다.

골목길을 나오다 주차 차량을 피하려 핸들을 꺾었다면 A씨를 칠 수밖에 없는 현장 환경에 차씨는 “내가 핸들을 꺾었다면 사람을 쳤겠지만, 절대 핸들을 돌리지 않고 정방향으로 직진만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베테랑 택시기사인 차씨도 간과한 것이 있었다.

수사팀은 현장에 가기 전 이미 차씨 택시에 부착된 운행판독기에 대한 분석을 국과수에 의뢰해 사고 당시 차씨 차량의 핸들이 왼쪽으로 13도가량 틀어진 기록이 있다는 통보를 받은 상태였다.

모든 택시에는 GPS 기능이 있는 운행판독기가 있으며, 특정 시점에 어느 방향으로 어느 정도 핸들을 틀었는지까지도 기록이 된다.

차씨는 그제야 “내 차량에 기록된 증거들이 그렇게 돼 있다면 아마도 내가 그랬던 것 같다”고 범행을 시인했다.

경찰은 차씨에 대해 12일 특가법상 도주차량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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