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나간 군인정신’에 진료받을 권리 묻혀

’빗나간 군인정신’에 진료받을 권리 묻혀

입력 2011-05-30 00:00
업데이트 2011-05-30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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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통 호소하면 얼차려…억압된 분위기가 병 키워전문가들 “사병 진료 접근권 보장 시급”

지난 2월27일 신병훈련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정모(20) 훈련병은 중이염 증세로 수차례 외진을 요구했으나 훈련소 측이 묵살하자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육군훈련소 지구병원 군의관은 외진을 보내달라며 애원하는 그를 기간병을 불러 쫓아냈고 소대장은 꾀병환자로 낙인찍었다.

정 훈련병의 어머니 강모씨는 병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군을 원망하며 거짓말쟁이로 몰린 아들의 명예를 찾고자 국가인권위와 군인권센터 등 관련기관을 찾아다니고 있다.

최근 군 내 사망사고가 잇따르면서 군 내부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허술한 군 의료체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제도권에서 논의 중인 군 의료체계 개선 방안은 군 병원의 시설 확충과 장기근무군의관 확보 등 의료 시스템을 보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들은 의료 시스템 자체의 개선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병사가 마음 편히 군 의료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는 진료 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고 수준의 의사가 근무하고 최신 장비를 갖추더라도 병사의 진료 접근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군에서 병을 키운 사례 대부분은 억압적이고 상명하달식인 분위기에 짓눌려 진료를 요구할 생각조차 못하거나 고통을 호소하더라도 상급자가 꾀병으로 치부해버린 경우들이었다.

2009년 국가인권위는 병사의 의료접근권이 무시된 사례를 모아 군 의료 종사자를 위한 군대 의료분야 인권교육교재를 편찬했다.

교재에는 신병교육대에서 “오늘 진료 안 받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람만 치료받아”라고 하거나 “머리 아프다고? 머리 박아”라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사실상 진료권을 박탈한 사례가 실려 있다.

신병교육을 받던 중 군의관에게 진찰받은 결과 단순감기로 약을 처방받았으나 증세가 호전되지 않고 자대배치 후 열이 계속돼 민간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뇌수막염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또 피부에 피고름과 멍이 자주 생긴다고 호소하자 관련 분야의 전문의가 아닌 군의관이 단순한 피부질환으로 판단해 치료했지만 전역 이후 민간병원에서 재생불량성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

국방부 인권담당관실 법무관으로 근무할 때 교재 집필에 참여한 성주목 변호사는 “각 군에서 올라온 사고사례를 모아보니 너무나 어이가 없어 비분강개하며 원고를 썼지만 아직도 병사의 진료권은 무시당하기 일쑤인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또 숨진 정 훈련병의 어머니는 “아들이 ‘살려달라’는 말까지 하며 애원했는데도 군은 힘없는 훈련병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며 “이런 군이 어떻게 ‘믿고 자식을 맡기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은 “아픈 병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는 병사를 쓰고 버리는 보급품처럼 여기는 군 지휘관 때문”이라며 “다치거나 아파도 치료받지 못한다는 걸 아는 병사가 전투력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이후 군은 ‘실전형 군대’를 내세우며 훈련 강도를 크게 높였지만 ‘국민의 신뢰를 받는 강군’으로 발돋움하려면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군의료체계도 전투력 증강 차원에서 개선하려는 접근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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