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雪)의 계절’… 그와 그녀들의 ‘눈’에 얽힌 추억

‘눈(雪)의 계절’… 그와 그녀들의 ‘눈’에 얽힌 추억

입력 2010-11-17 00:00
업데이트 2010-11-17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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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당’ 대굴욕 ‘애틋’ 순애보 ‘삽질’ 악몽이…

서울에 첫눈이 왔다는 소식이 벌써 들려왔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를 올겨울 첫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 첫눈이야 억울하겠지만 눈에 보이고, 펑펑 와야지만 ‘첫눈’이 왔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 즐거운 이야기든 슬픈 이야기든 누구나 눈에 얽힌 사연은 한두 가락씩은 있다. 싱글들의 잊지 못할 눈에 얽힌 추억을 들어봤다. 올겨울 눈에 추억을 새기고, 사랑이 영글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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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지고·화내고 ‘굴욕의 나날’

학원강사 이은정(29·여)씨는 지난겨울 폭설 때문에 평생 잊지 못할 ‘대굴욕’을 당했다. 이씨는 지난해 12월 친구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났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남자가 적극적으로 연락하자 올 초 두 번째 만남을 갖기로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쁘게 보일 욕심을 낸 것이 화근이었다. 미니스커트에 10㎝ 높이 부츠를 신고 잔뜩 멋을 내고 나갔는데 만나자마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던 것.

남자는 눈치도 없이 눈이 온다며 강아지처럼 좋아했고, 갑자기 눈을 맞으며 산책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씨는 마지못해 승낙을 하고 뒤뚱뒤뚱 걷기 시작했다.

내리막길에서 이씨는 그만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무안함을 느낄 새도 없이 옆에서 지켜보던 남자가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에 이씨는 정신을 차렸다. 민망함은 사라지고 화만 났다. 남자는 나중에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이씨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어쩌면 하이힐 부츠를 신고 나간 제 잘못일지도 모르죠. 그 이후로는 눈 올 때면 항상 굽 낮은 구두만 신어요.”

회사원 최영수(33)씨는 어느 해 겨울 마음에 둔 여자친구에게 “첫눈이 오면 특별한 이벤트를 하겠다.”고 공언했다가 실행하지 못해 오히려 사이가 서먹해진 안 좋은 경험이 있다. 최씨는 첫눈이 올 때를 대비해 미리 전망이 좋은 고급 음식점에 이벤트 물품들을 갖다 놓았고, 영상편지 등 여자친구의 환심을 살 갖가지 프로그램까지 준비해 뒀다. 많은 이들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 쑥스럽긴 해도 여자친구가 이런 이벤트를 원하는 눈치여서 한달 정도 여유를 두고 정성껏 행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이벤트를 하기로 약속한 전날 심한 독감 증상이 나타났고,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그는 비몽사몽간에 자취방으로 돌아온 뒤 그대로 혼절하듯 쓰러졌다. 다음날 여자친구는 “왜 예약해 놓고 오지도 않느냐.”고 타박했고 “독감이 심해 가지 못했다.”는 대답에도 화를 풀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날을 잡아 이벤트를 하겠다’는 말에도 화를 내는 여자친구에게 서운해 제대로 연락하지 않다가 그대로 사이가 멀어져 버렸다.”면서 “첫눈이 올 때 거창한 이벤트를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오히려 일이 더 어그러져 버렸다.”고 한탄했다.

서울에 사는 회사원 김중원(32)씨는 2년 전 초겨울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눈 소식을 일기예보에서 듣게 됐다. ‘그냥 흩날리는 눈 말고 강원도에 가서 진짜 눈을 맞아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평소 사랑을 고백하려던 동료 여직원을 데리고 설악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급히 떠나다 보니 월동장비를 챙겨오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강원도 국도에서 차량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가드레일을 살짝 들이받는 사고가 났고, “눈이 무섭다. 다시 돌아가자.”는 여직원의 성화에 그림 같은 설경은 구경도 못하고 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귀갓길이 심한 정체로 막히자 동료 여직원은 “다시는 강원도에 오지 않겠다.”고 잘라 말해 그를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눈을 워낙 좋아해 급하게 떠났던 것이 화근이었다.”면서 “올해 초 눈이 많이 왔을 때도 사고 났던 그때가 떠올라 제대로 여행도 떠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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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로 얼룩진 눈 오는 날

회사원 박성미(31·여)씨는 지난겨울 내린 폭설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애지중지하던 ‘애마’ 자동차가 크게 망가질 뻔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벼르고 벼르던 ‘오너 드라이버’의 길을 걷기 위해 박씨는 자동차를 장만했다. 회사생활 5년차 만에 처음 갖게 돼 가장 인기 있는 준중형차로 뽑았다. 박씨는 “나 말고는 아무도 운전대를 못 잡게 할 정도로 아끼던 차였다.”고 말했다.

올 1월 회사 첫 출근날, 박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를 운전해 집을 나섰다. 박씨의 부모는 이런 날 차를 갖고 다니는 게 아니라며 만류했지만 “날 궂을 때 버스나 지하철 타는 게 싫어서 차를 샀다.”면서 의기양양하게 끌고 나갔다. 평소 차로 30분이면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설마 무슨 일 나겠어’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동네 어귀에서부터 말썽이 났다. 경사가 30도 정도인 곳에서 박씨의 차는 힘을 쓰지 못했다. 엔진소리만 요란하다가 차가 갑자기 반바퀴를 휙 돌자 정신이 아찔했다. 빙글 돌던 차는 결국 동네 어귀에 있던 가로수를 들이박았다. 결국 생돈 50만원을 날려야 했다. “그 이후에 체인이랑 월동장비를 모두 구입해 놨지만 겁나서 눈 오는 날에 차를 못 몰겠더라고요. 지난겨울에는 내내 눈이 와서 뚜벅이로 생활했어요.”

대기업에서 일하는 조현수(31)씨도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다. 몇 해 전 첫눈이 온다는 소식에 들떠 강원도로 떠났다가 집에 돌아오지 못할 뻔한 기억 때문에 “다시는 강원도에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 강원도 속초에 도착했을 때까지는 좋았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함께 떠난 여행이라 눈을 맞으며 바닷가에 가서 사진도 찍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너무 늦게 출발한 탓인지 길이 막히기 시작하더니 서울을 눈앞에 두고 길이 주차장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속초에서 서울까지 오는 데 무려 15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을 겪다 보니 ‘첫눈’만 생각하면 진저리가 난다고 했다. 그는 “첫눈도 좋지만 두번째 눈, 세번째 눈도 사실 따지고 보면 같은 눈”이라면서 “차라리 여유 있게 눈 구경하러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해 요즘은 첫눈에 너무 연연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눈만 오면 치를 떠는 싱글도 있다. 2년 전 군대를 졸업하고 복학한 대학생 김윤수(25)씨. 그는 눈만 오면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하루종일 ‘삽질’했던 악몽이 떠오른다. 꽁꽁 언 손과 발로 몇 시간씩 눈을 치운 기억이 강해 눈을 보면 로맨틱한 감정보다 힘들었던 군대시절만 생각난다. 그는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 중에 상당수는 눈만 오면 앞이 깜깜한 나 같은 기분을 느낄 것”이라면서 “도로에 쌓인 눈 치우랴 인근 마을 제설작업 지원 가랴 눈 오면 불쌍한 군인들만 떠오른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그는 “눈이 오면 죽마고우들과 따뜻한 국물에 소주를 마시면서 군대시절 눈 치웠던 얘기로 날밤을 새운다.”며 “첫눈은 우리에게 안주 삼아 얘기하는 단골소재”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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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내리면 싱글들의 마음 한편에서 풋풋한 첫사랑의 기억, 눈과 얽힌 에피소드 등 아련한 옛 추억이 피어난다. 사진은 영화배우 이준기(왼쪽)와 미야자키 아오이 주연의 한·일 공동제작 영화 ‘첫눈’의 한 장면.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첫눈이 내리면 싱글들의 마음 한편에서 풋풋한 첫사랑의 기억, 눈과 얽힌 에피소드 등 아련한 옛 추억이 피어난다. 사진은 영화배우 이준기(왼쪽)와 미야자키 아오이 주연의 한·일 공동제작 영화 ‘첫눈’의 한 장면.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지워지지 않는 연인과의 추억

그날이었다. 마치 로맨스 영화에서처럼 첫눈에 반한 그녀를 만난 날이 바로 첫눈이 내리던 그때였다.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김성모(36)씨는 아직도 첫눈이 내릴 때만 되면 가슴 한쪽이 시린다. 8년 전 눈이 내리던 11월의 어느 날, 온라인을 통해 만난 여성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는 “당시에는 지금처럼 채팅으로 사람을 만나는 게 흔하지도 않았는데, 약속이 갑자기 취소되는 바람에 우연히 채팅을 하다 근처에 사는 사람과 충동적으로 저녁 일정을 잡았다.”면서 “그녀를 기다리는데 마침 첫눈이 내렸고, 택시에서 내리는 그녀가 그동안 제가 그려오던 이상형이라 정말 가슴이 멎을 뻔했다.”면서 애틋한 심경을 전했다.

긴 생머리에 반달형의 눈, 적당한 키…. 그는 ‘이렇게 사람한테 반하는 거구나.’라며 몇 년간 짝사랑의 열병에 시달렸다.

하지만 여러 번 구애를 해도 친구 이상은 받아주지 않는 그녀 때문에 마음고생만 하던 그는 지난해 어렵게 마음을 접었다. “이제 그냥 첫눈 오는 날 떠오르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려고요. 다른 사람을 만나도 아직은 그녀가 떠오르긴 하지만요. 제가 너무 순애보인가요.”

고등학교 교사인 정승운(30)씨는 첫눈에 얽힌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지난해 사귀었던 연인과 첫눈 때문에 헤어졌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것을 유난히 좋아하던 예전 여자친구가 첫눈 오는 날 저녁에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만나자고 몇 달 전부터 노래를 불렀는데 정씨가 이를 깜박한 것.

그는 “도대체 진눈깨비가 날리는 게 첫눈인지 함박눈이 펑펑 내려야 맞는 건지도 헷갈리고, 그날 일이 바빠 생각이 나지 않았다.”면서 “이유 없이 기억해 내지 못한 것을 애정이 식었다고 오해한 애인이 예전 일까지 들춰 따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이별까지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도대체 여자들은 왜 첫눈에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남자들은 눈이 오면 길이 미끄러워 차가 막힌다든가, 날씨가 추워지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특별히 로맨틱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투덜거렸다.

정현용·백민경·이민영기자 min@seoul.co.kr
2010-11-17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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