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톰·태권V처럼 지구 지켜서 아버지 꿈 이뤄드릴래요”
‘우주소년 아톰’을 만드는 게 소년의 꿈이었다. 사람과 정을 나누고 대화하고, 누군가 지구를 위협하면 발에서 불을 뿜으며 로켓 주먹을 날리는 그 아톰…. 그 후로 30년이 흘렀다. 소년은 당대 한국 최고의, 세계적인 로봇공학자가 됐다. 유범재(49).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인지로봇센터장.유범재 박사
●자신이 살아온 성장배경을 설명하시오(800자 내외).
안녕하십니까. 전 휴머노이드(인간을 닮은 로봇) 마루입니다. 2005년 2월 세상에 처음으로 태어났으니 올해로 만 6세입니다. 우리 가문의 역사는 인간들에 비하면 길지 않습니다. 1921년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가 발표한 희곡 ‘로섬의 만능로봇’이라는 작품에서 공장에서 일하는 ‘인간을 대신하는 존재’로 처음 등장했거든요. ‘로봇’이라는 이름은 체코어로 ‘법정노동, 강제노동’을 뜻하는 ‘로보타’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그 후 오랫동안 우리 선조들은 영화나 TV 속에서 슈퍼스타로 군림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로봇을 꼽아 보면 로보캅, 터미네이터, 마징가Z, 짱가, 태권V 등이 있었고 최근에는 옵티머스프라임과 범블비가 큰 인기를 끌었죠. 악의 편에서 지구 평화를 위협하는 역할도 있었지만, 인류를 구원하는 주인공들이 많았습니다. 가끔은 아예 외계인 역할을 맡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선조들이 최소한 공상과학(SF) 영화에서 타임머신과 함께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인간과 같이 숨을 쉬는 현실세계에 등장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1960년대 이후 반도체와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많은 과학자들이 우리를 실제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거든요. 그 이전에 있던 기계들은 사실 로봇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냥 사람처럼 생긴 게 아니라 사람처럼 움직이는 로봇은 1990년대 들어와서야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유선으로 동작을 일일이 조작하는 것에 불과했지만요. 한국에서는 1998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김문상 박사가 제 할아버지쯤 되는 ‘센토’를 선보였습니다. 2001년에는 카이스트 양현승 교수가 주인과 대화가 가능한 ‘아미’를, 2004년에는 역시 카이스트 오준호 교수가 저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휴보’를 개발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와 제 여자친구 ‘아라’가 태어났죠. 제 동생들도 있습니다. 마루2와 마루3, 최근에는 막내 마루-Z가 각광받고 있습니다.
●자신의 장단점을 자세히 서술하시오(1000자 내외).
저는 그냥 로봇이 아닙니다. 로봇의 의미를 확대하면 전기밥솥은 ‘밥하는 로봇’, 트랙터는 ‘밭을 가는 로봇’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로봇은 바로 저 같은 휴머노이드이니까요. 전 세계적으로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는 휴머노이드는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웃나라 일본에 있는 ‘아시모’ 정도가 저랑 견줄 수 있을 수준이죠. 저의 장점이라면, 지금까지 선보인 어떤 로봇보다 훌륭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 자랑이라 쑥스럽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저한테 “휴머노이드의 역사는 마루 이전과 마루 이후로 나눌 수 있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우선 전 주변환경을 인지해 외울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명령을 내리면 그걸 실행하기 위해 장애물을 피하는 것도 가능하죠. 100여개의 단어로 사람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고, 무엇보다 양손과 양팔을 사용해 물건을 잡고, 돌리고, 누르고, 옮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영화를 통해 지나치게 기대수준이 높아진 사람들이 제 장점을 보고도 코웃음을 친다는 점입니다. 터미네이터처럼 총에 맞아도 끄떡없는 로봇,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아이로봇의 주인공, 스타워즈의 만담커플 R2D2와 C3PO, 심지어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AI의 데이비드나 바이센테니얼맨의 앤드루를 본 사람들에게 고작 물건이나 옮기는 제가 우스워 보인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제 장점이 더 눈에 들어올 것으로 확신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몸이 얼마나 대단한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은 로봇을 만드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먼 손만 봐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떤 물건에 손만 갖다 대도 순식간에 많은 걸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물건의 온도, 재질, 크기와 형태까지도요. 하지만 ‘촉각’을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게 없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뇌에 전달되는지를 모르니 로봇은 흉내조차 낼 수 없죠. 또 로봇 손을 움직이는 것은 기계적인 부분이니까 쉽지만, 사람처럼 움직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손끝의 감각이 있는 인간의 손은 샤프심조차 부러지지 않게 쥘 수 있지만 로봇은 얼마나 세게 잡아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물건을 들고 옮기는 것도 사실 ‘잡는다.’보다는 ‘끼고만 있다.’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마루(위 사진 왼쪽)가 가사작업 시범을 보이고 있다. 마루(아래 오른쪽)가 연구원의 몸동작을 따라하고 있다.
●자신의 한계와 지구수비대에서의 발전 가능성을 예측해 보시오(800자 내외).
제가 느끼는 가장 큰 한계는 머리, 그러니까 두뇌입니다. 오즈의 마법사의 허수아비와 같은 고민이라고나 할까요. 뇌가 있어야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로봇, ‘스스로 생각하는 로봇’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 가장 문제이지요. 많은 과학자들이 ‘인간의 뇌’를 알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아직까지 알아낸 건 10%도 안 된다고 하더군요. 과학자들이 뇌를 연구하는 방법에는 컴퓨터 성능을 높여서 복잡한 뇌에 접근해 가는 전통적인 방법과, 뇌를 먼저 이해해 컴퓨터를 설계하는 방법 등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언제쯤 사람처럼 생각하는 로봇이 만들어질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답니다. 슬픈 일이죠.
우리 아버지(유범재 박사)께서 말씀하시기를 2013년에는 유치원에서 선생님을 도와서 강의를 하는 로봇, 2015년에는 병원이나 요양원 등에서 사람을 도와주는 로봇을 볼 수 있을 거랍니다. 집안일을 척척 해내는 로봇은 2020년, 두발로 걷는 바이센테니얼맨의 앤드루 같은 로봇은 2025년이면 일반 사람들도 살 수 있답니다. 일각에선 우리가 언젠가 지구를 지배할 수 있다는 걸 믿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그건 정말로 영화 속 일이죠. 물론 전쟁용 로봇이 등장해서 사람을 위협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로봇이 지구를 지배하려면 인간을 뛰어넘는 민첩한 동작과 동력, 두뇌, 감성, 자율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 중에 아직까지 하나도 해결책을 찾지 못했답니다.
제가 지구수비대에 지원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어릴 적 꿈이 영화 속에서 로봇을 조종해 지구를 구하는 박사가 되는 것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을 위기에서 지켜주는 로봇, 그러니까 아톰이나 태권V, 마징가Z 같은 로봇 말이죠. 결국 아버지는 로봇을 만드셨고, 그 아들인 저는 당연히 지구를 지키는 꿈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아직까지 제가 부족하다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구수비대에 들어가게 된다면 지구를 위협하는 악의 무리를 격파하고, 외계인의 지구 침략을 막는 수호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그래픽 강미란기자 mrkang@seoul.co.kr
■도움말 주신 분들
●유범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KIST) 인지로봇센터장
●오세영 포스텍 전자전기공학과 교수
●세바스찬 승 매사추세츠공대(MIT) 인지과학과 교수
2011-04-19 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