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리움이여! 아, 사람이여!

아, 그리움이여! 아, 사람이여!

입력 2010-11-21 00:00
업데이트 2010-11-2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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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자, 자신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움이 사무칠 때 무작정 길을 떠나나 봅니다. 그 길의 끝에서 분명 자신과 타협하지 않았던, 자신을 증명하려 했던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길을 걸으며 매순간 집중하다 보면 그 사람뿐 아니라, 진정한 나의 모습까지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진정한 나와, 진정한 그의 조우를 위해 다시 길을 나섭니다. 세 번째 경건한 소풍지는 그리움을 머금은 땅, 예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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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13:00~16:00 수덕사, 수덕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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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노랑은 그리움의 색이다. 금빛으로 물든 가을 논은 이제 안녕을 고할 노랑이고, 절정을 이루고 떨어질 단풍잎은 곧 눈물을 흘릴 노랑이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숭산 수덕사의 가을은 유독 그 색이 짙었다. 평생 그리움을 간직한 사람이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일까.

그 그리움을 간직한 이가 한국 근현대 화단의 거장 고암 이응노 선생이다. 수덕사는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사찰로 유명하지만, 이응노 선생이 살고 작업했던 수덕사 옆 수덕여관이 조명받은 건 최근의 일이다. 주인 없이 참혹하게 방치되던 여관은, 2006년 군이 복원공사에 앞장서면서 관리되기 시작했다.

수덕여관은 이응노 선생에게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선생은 어린 시절을 보낸 덕숭산과 수덕사를 무척 좋아해 수덕여관을 구입했다. 평생 우리 땅보다 외국 땅을 더 오래 밟고 살았던 그는 1948년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 거주하면서 수덕사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옮겼다. 또 1967년 정치적 문제(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겪은 후에도 선생은 이곳에 다시 와 마음을 다잡았다. 그 고된 시간을 견디며 새긴 암각화는, 애처로운 혼이 실린 듯 보인다.

그렇다고 그의 예술이 회의적이거나 몽상적으로 변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역동적이었다. 잠자던 문자조형에 활기를 불어넣은 듯한 <문자추상>과 이름 없는 무리를 화폭 가득 채운 <군상> 시리즈에 몰두했다. 특히 <군상> 시리즈는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사람 때문에 생긴 고독과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화폭에 담고 싶었던 건 다시 사람이었나 보다. 선생은 1977년 한 번 더 정치적 시련을 겪고 파리에서 귀국하지 못하다 1989년 혐의가 풀린다. 하지만 고국 땅을 다시 밟진 못했다. 귀국을 며칠 앞두고 타향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수덕여관에서 그리움이 더 짙게 느껴지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17:00~18:30 예당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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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은 세계 121번째 슬로시티다 . 한가롭게 거닐기, 남의 말을 잘 듣기, 꿈꾸기, 기다리기, 마음의 고향을 찾기, 글쓰기, 명상하기. 이상 일곱 가지는 슬로시티의 구호인데 이곳에서만큼은 전혀 어렵지 않다. 특히 국내 최대의 저수지이자 낚시터로 꼽히는 예당저수지 일대는 경관이 뛰어나고 걷기 좋은 산책로. 이곳에서는 걸으며, 쉬며, 느끼며 슬로시티 구호를 충분히 실천할 수 있다. 내면을 활짝 열고 귀 기울이는 일은 생각보다 즐겁다.

둘째 날 10:00~13:30 임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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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리는 후들거리고, 숨이 목까지 차올라 말도 못할 지경인데도 “와” 하는 탄성은 절로 나왔다. 봉수산(대흥산) 봉우리를 두른 2.4킬로미터의 석성인 임존성에서 내려다보니 예당저수지와 그 주변을 감싼 마을이 장난감처럼 손바닥 위에 놓인다.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격전지 임존성에서 본 전경은 그만큼 눈부셨다. 임존성에 오르는 코스는 다섯 곳인데, 하나같이 특색 있다. 숲이 우거져 나무 밑을 기어야 하는 등산로가 있는가 하면, 차로 성벽 바로 밑까지 접근할 수 있는 임도까지 있어 골라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임존성 남쪽에는 내상산이 위치하는데, 주민들끼리의 별칭은 따로 있다. 일명 웬수산,원수산. 내상산 정상에서 임존성이 훤히 다 보이는 바람에 백제 부흥군이 적군에게 패한 이후로 이 산을 ‘원수’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때는 원수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임존성이 잘 보이는 ‘명당’으로 탈바꿈했으니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현재 임존성은 일부 구간이 복원 공사를 진행 중이니 금지구간을 확인하고 오르기를 권장한다. 또 임도로 올라가지 않았다면 이 길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 좋다. 등산로 네 군데는 대흥면과 이어진 반면 임도는 광시면으로 난 길이라 정반대 방향이기 때문이다.

15:00~17:30 추사고택, 추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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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는 그림처럼 쓰고, 그림은 글씨처럼 그려야 비로소 글씨와 그림이 합의일체를 이룰 수 있다고 한 추사 김정희. 그가 나고 묻힌 고택이 충남 예산 신암면에 자리하고 있다. 쭉쭉 뻗은 나무기둥이 솟은 안채로 들어가면 금방이라도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추사 선생이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만큼 고택의 보존 상태는 훌륭하다. 사랑채가 보수공사 중인 것이 흠이라면 흠. 공사는 올해 말까지 지속될 예정이다.

고택의 왼편에 위치한 추사기념관에서는 선생의 삶을 더 자세히 엿볼 수 있다. 이 탁월한 예술가는 벌써 세 살에 붓을 쥐고 글씨를 썼다고 한다. 그 천부적인 재능과 함께 “내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 되지만 나는 70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노력이 더해져 세기의 예술가 김정희가 완성됐다고 감히 짐작해본다. 진정한 몰입과 완숙함의 경지를 느껴볼 좋은 기회다.

글 송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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