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두다 | 농촌 가을걷이] 농부는 농사만 짓고 사는 세상이었으면

[거두다 | 농촌 가을걷이] 농부는 농사만 짓고 사는 세상이었으면

입력 2010-11-21 00:00
업데이트 2010-11-2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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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가을걷이를 하는 날입니다. 편집회의를 거쳐 이달 주제를 ‘거두다’로 정하고 우리 땅에 벼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가을걷이 이야기를 좀 더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평소 《삶과꿈》을 위해 자료 사진을 곧잘 찍어주던 젊은 농부 영태 형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형님은 흔쾌히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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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인터넷과 TV를 보며 몇 번이고 내일 날씨 맑음을 확인했건만 뜬금없는 비가 걱정입니다.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갑니다. 속 모르는 개들이 컹컹 시끄럽게 짖어댑니다.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달 언저리를 흰구름이 둥그렇게 감싸 안고 있습니다. 내일은 비는커녕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이 분명합니다. 그제야 안심하고 다시 이부자리에 들어가 잠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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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 가을걷이는 생각보다 늦은 시간에 시작됩니다. 아침 이슬을 맞은 채로는 나락(벼)을 벨 수 없기에 밤 사이 나락에 내려앉은 이슬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농부의 시계까지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아닙니다. 동이 트기 전 젊은 농부는 자리에 일어나 오늘 추수에 꼭 필요한 나락가마니를 챙기고, 콤바인(벼를 베는 농기계)을 점검합니다. 아무래도 진흙 위에서 기계를 돌리다보니 매일 이렇게 꼼꼼하게 준비를 하지 않으면 하루에도 몇 번이고 먼 읍내의 농기계수리센터까지 다녀와야 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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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농촌의 논밭은 가을걷이가 한창입니다. 바야흐로, 때가 되었다는 듯, 잘 여문 알맹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내밀고 인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가을걷이를 할 논에 도착해 영태 형님은 마을에 젊은이가 몇 안 되고, 농사일에 꼭 필요한 농기계까지 있어 동네 할매 할배 농사일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다 보니 정작 자신의 논은 비워두는 일이 많았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합니다. 아마도 지난 태풍에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나락이, 나락 사이로 조금씩 고개를 디민 피(잡초)가 부끄러웠나 봅니다. 말은 언제나 자신은 아직 서툰 새내기 농부라고 말하지만 그 마음만은 이미 충분합니다.

진흙탕이라고 생각했던 논바닥은 생각보다 단단했습니다. 가을걷이를 앞두고 알맹이를 여물게 하기 위해 물대기를 멈추고 논에 차 있던 물마저 모두 빼낸다고 합니다. 논에 물이 가득하면 나락들이 땅과 햇볕을 받으며 얻은 힘으로 열매를 영글게 하지 않고 키만 키우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척박할수록 번식을 위해 열매를 더 단단하게 키우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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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수평선. 나락들이 바람 따라 출렁입니다. 이윽고 준비를 마친 배가 출항하듯 콤바인이 논 한구석부터 나락을 야금야금 베어 먹으며 지나갑니다. 육중한 기계음을 내며 콤바인이 지나간 자리에는 벼 밑둥만 남습니다. 밑둥이 잘린 나락은 콤바인 안에서 낟알과 볏짚으로 분리됩니다. 낟알 털리는 소리는 어릴 적 논두렁에 쥐불을 놓으며 바짝 마른 풀잎들이 불타며 내는 소리를 닮았습니다. 타닥타닥. 그 소리 참 경쾌합니다. 분리된 낟알은 잘 말려 씨앗의 껍질을 벗기며 사람 먹는 쌀이 되고, 볏짚은 잘 말려 여물로도 쓰이고, 논밭에 뿌려져 다음해 농사를 위한 거름으로 쓰일 것입니다.

아직 밥 때가 되려면 두어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까부터 배꼽시계가 꼬르륵~ 신호를 보냅니다. ‘농사는 밥심!’이라고 하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주머니에 비상식량 초코파이 하나쯤은 꼼쳐둘(감추다) 걸 그랬나 봅니다.

때마침 새참을 내오는 어머니께서 빨간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논두렁 길 위를 걸어옵니다. 울퉁불퉁 꼬불꼬불 좁고 험한 논두렁 위를 건너오지만 머리에 인 무거운 다라이에는 손도 안 댑니다. 그래도 다라이는 크게 한 번 휘청거리는 법이 없습니다. 두 손을 휘휘 저으며 곡예사처럼 다가오는 저 생활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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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막걸리와 김치부침개. 낮술에 금방 얼굴이 붉게 달아오릅니다. 오늘 술안주 삼은 화두는 형님에게 가장 필요한 여자친구(펜팔친구)와 서울만 가면 10배가 넘게 뻥튀기 되는 배추 값, 그리고 오늘 거둬들이는 쌀값.

“애완견 사료 값이 1킬로에 만 원이 넘는 것도 있는데 사람이 먹는 쌀값은 이천 원도 안 돼. 물가는 안 오른 거 없이 다 올랐는데, 하다 못해 금값까지 오른 상황에서 나락 값만 20년 전으로 떨어져 버렸으니. 때에 맞춰 농약 치고 비료 주고 밥상에 오르기까지 분주히 움직여야 하는 내 신세가 참 처량해.”

답답한 마음에 아무리 바빠도 농민대회에는 웬만하면 꼭 참석한다는 형태 형. 그의 소망은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만 짓고 사는 세상’입니다. 언제나 허허하하! 시원스레 웃어 재끼는 사람 좋은, 그의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서 우리 땅에서 농사짓는 대부분의 농부들 삶을 읽습니다.

하루해가 저물도록 가을걷이는 계속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직 정부에서 쌀값이 책정되지 않아 공판장까지는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영태 형님께 꼭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여자친구를 구해주마 철석같은 약속을 하고 돌아섭니다.

긴 하루의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때에 맞춰 농약 치고 비료 주고 밥상에 오르기까지 분주히 움직여야 하는 내 신세가 참 처량해” 그의 한마디를 몇 번이고 곱씹어 봅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오늘 거둬들인 쌀의 무게만큼 무거운 짐을 당신 혼자 지고 가게 만들어서.

글_ 임종관·사진_ 주영태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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