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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프라메이드 Pla-maid - 송경화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프라메이드 Pla-maid - 송경화

입력 2014-12-31 17:26
업데이트 2014-12-3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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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라모델 Pla-model


늦은 오후, 오경성의 작은 원룸. 무대 전면 책장에는 프라모델 박스가 보기 좋게 진열되어있다. 대신, 책장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입던 옷과 편의점 비닐봉지와 쓰레기들로 난잡하게 뒤엉켜 있다. 핸드폰 벨소리. 쓰레기 더미에서 자고 있던 오경성 더듬더듬 핸드폰 찾아 받는다.

경성 (잠에 취해) 여보세요. (놀라 눈 번쩍 뜨고 목소리 바꾼다) 졸긴 회사지. 회의 중이라 그래. 잠깐 나왔어. 들어가야 돼. 응. 별일 없제. 택배? 여기도 시장 가면 다 있어. 아따, 걱정 마소. 굶어 죽을까봐? 없어. 눈 크게 뜨고 찾아봐도 없단 게. 참한 처자가 어디 있어 요새. 부장님이 찾네. 응. 건강 챙기소. (전화 끊고, 깊은 한숨) 이것도 그냥 없애 버릴까. 전화도 안 오는데, 돈만 나가지. (냉장고로 가서 우유를 꺼내 마시더니 인상 찡그리고는 싱크대로 가 뱉어낸다. 유통기한 확인하고) 6월 30일? (냉장고에서 봉투를 하나 들췄다가 악취로 찡그리고는 묶어서 구석으로 던져 버린다) 꽃이 만발했네. 꽃이. 파란 꽃 까만 꽃. 이게 오늘 건가? (다른 봉투에서 햄버거를 꺼낸다) 하와이안 버거. 넌 어째 맨날 폐기냐.

경성, 속이 쓰린지 배를 몇 번 쓸어내리더니 햄버거를 다시 냉장고에 넣는다. 책상 위에 놓인 프라모델 박스에서 아직 다 완성되지 않은 프라모델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프라모델의 도색이 엉망진창이다.

경성 또 실패다. 넌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한 거야. 처음 온 애는 그냥 꺼매. 쟤들 중에 니가 제일 예뻐. 알록달록 봐줄만 해. (조립하며) 물론 니 입장에선 내 어설픈 도색보다 처음 공장에서 찍어준 색깔이 훨씬 멋지다고 생각할 수 있어. (박스 표지 보여주며) 자 봐. 어때 보여. 멋져 보여? 너 공장에서 태어날 때 얼마나 많은 애들이 너랑 똑같이 태어났는지 아냐? 걔들 다 이렇게 생겼다고. 너랑 똑같이 생긴 애들이 세상에 막 넘쳐난다고 생각해봐. 그럼 너가 꼭 너여야만 하는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하지만 지금은 어때. 개성이 넘치지. 이 세상에서 이렇게 개성 있게 생긴 건담은 너 하나밖에 없을 거 같지. 바로 그거야. 그러니까 자부심을 가져. (사이) 근데 나는 왜 이렇게 손재주가 없냐. 이건 뭐 해도 해도 늘지를 않아. 암만해도 예술적 재능은 타고나야 하는가봐. 다른 사람들은 폼 나게 도색해서 블로그며 카페며 사진으로 도배를 해놓던데. 나는 몇 년째 도색초보. 이게 뭐냐, 이게- (사이) 근데 발이 하나 어디 갔지? 내가 분명히 박스에 넣어뒀는데 어디 흘렸나? (주변을 둘러보지만 쓰레기장이라 치울 엄두가 안 난다) 너에게 발을 찾아주려면 여길 다 치워야겠지. 그러려면 일주일은 걸리겠지. 그래, 이 기회에 좀 더 유니크한 건담이 되기로 하자. 외발이 건담. (방에 굴러다니는 나무젓가락을 주워 목발로 만들며) 한 쪽 다리가 잘려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악의 무리와 장렬히 싸우며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하고 돌아온 너, 우리의 영웅 외발이 건담. 이야. 멋지다. 목발 짚으니까 끝내준다. 끝내주긴 옘병할, 진짜 갖다 버리고 싶다. 너도 박스째 진열이다.

경성, 책장에 프라모델 박스를 진열한다. 박스 하나하나를 만지는 모습이 정성스럽다. 노트북을 켠다. 프라모델 구매 사이트에 접속하는 경성.

경성 이번엔 뭘 사지? 오, 이거 죽인다. 하, 가격 봐라. 패스. 이건 내가 하긴 좀 어려울라나?! 그래도 프라모델은 역시 도색 작업이 백미인데 말야. 진열할 만한 게 하나도 없냐. 요전 거에다가 액세서리를 좀 달아볼까. 어디 보자. 뭐야, 부스터 유닛 주제에 십만 원? (지갑 열어 본다. 한숨) 오늘은 그냥 RX-78로 만족하자. 바로 구매. 실시간 계좌 이체. 응? 뭐야. 이벤트 자동 당첨? 저희 ‘프라프라’ 프라모델을 애용해 주시는 고객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리고자 인공지능 개발업체 딥블루와 합작하여 만든 휴머노이드 프라메이드를 시판 전 총 3분께- 스팸인가?!

소리 오경성씨!

경성 ??

소리 (문 두드리며) 오경성씨! 택배요!

경성 ????

소리 오경성씨!

경성 네! 나가요!! (퇴장)

사이. 잠시 후, 커다란 상자를 가지고 들어온다.

경성 (낑낑대며) 빌어먹을, 더럽게 무겁네. 내가 요새 먹는 거라고는 하와이안 버거밖에 없어서 그런가. 라면 박스만 들어도 팔다리에 힘이 쭉 빠진다니까. 이따 출근해서 족발이라도 사먹어야지 안 되겠다. (힘겹게 방안으로 상자를 들여놓고 살핀다) 그나저나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생기네. 그 흔한 천 원짜리 로또 한번 맞아본 적 없는 내가 이벤트 당첨이라 (상자 글씨 읽으며) 휴머노이드프라… 새로 나온 프라모델인가??

의자 위에 올라서서 박스 테이프를 뜯어내는 경성. 조심스럽게 상자 뚜껑을 연다.

경성 !!!!!!!!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상자 뚜껑을 닫는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여러 번 심호흡 하고는 다시 천천히 상자 뚜껑을 연다. 흥분과 설렘으로) 서, 설마. 이건 프라프라 캐릭터 토이 스타디움에서나 볼 수 있다는 십분의 일 프라모델?????!!!!!!!

잔뜩 흥분한 경성, 칼로 상자 자르는데, 마치 포정해우(?丁解牛)를 보는 듯 흥이 난다. 보기 좋게 잘려 나간 상자들 사이로, 휴머노이드 프라메이드가 모습 드러낸다.

경성 (감탄하며) 섬세함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색감도 살아있고 비례도 좋다. 근데 이걸 왜 완성품으로 보냈을까? 조립이 안 돼서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전화벨 소리.

경성 (받으며) 예, 사장님. 예? 또 결근이에요? 네, 7시까지는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예, 알겠습니다. (전화 끊는다) 저녁 알바 얘 안 되겠네. 맨날 아프대. 아프긴 뭐가 아파 친구들이랑 술 먹느라 그러는 거지. 악덕 점주도 문제지만 악덕 알바 얘네 때문에 전국에 있는 성실한 알바들만 손해 본다니까.

서둘러 출근 준비하는 경성. 싱크대에서 물로 눈곱만 대충 떼어내고, 가그린으로 입을 헹군 후, 방에 널브러져 있는 옷 중에서 냄새가 적고 덜 구겨진 것으로 골라 입은 다음, 떡진 머리에 모자를 눌러쓴다. 늘 배어 있는 습관처럼 빠르고 정확하다.

경성 (프라메이드에게) 엉아 출근한다. 집 잘 지키고 있어라.(퇴장)

잠시. 프라메이드의 눈에 불이 들어온다. 프라메이드 스위치 온 더 파워. 배터리 차지 오브 풀. 웰컴 투 휴머노이드 월드 인 코리아. 암전.

2. 편의점

새벽. 심야영업 중인 편의점. 경성, 씩씩대며 대걸레로 바닥 청소 중이다.

경성 술을 처먹으려면 곱게 처먹을 것이지, 전봇대, 담벼락 노상 방뇨할 때가 쌔고 쌨는데, 남의 매장에다 실례를 하고 지랄이야. CCTV 캡처해서 문 앞에 크게 붙여 놓을까 보다. 오늘 일진이 왜 이러냐. 돈을 면상에 던지는 손님이 있질 않나. 담뱃불 빌려 달라고 파는 라이터 집어 가는 놈이 있질 않나. 비닐봉지 값 20원 받는다고 개새끼 소새끼 욕하는 놈이 있질 않나. 아니 비닐봉지 값 내가 받자고 했나? 봉지 값 내는 게 싫으면, 정부에 민원을 넣든지, 아니면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시든지. 아 진짜 드러워서 못해 먹겠네. (걸레 바닥에 던지고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과 새로 입고된 즉석식품을 바꿔 진열한다) 하와이안 버거. 오늘도 너냐. 인생 참 그렇지? 여차하면 이렇게 폐기되는 거야. 근데 거기서 끝인 줄 알아? 너 이러다 매대에 진열되지도 못해. 생산 자체가 안 된다고, 알아? 아는 놈이 임마, 그러고 노력을 안 하냐? 경쟁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냐! 행사 진행해서 음료 증정품이라도 데려나오던지 아니면, 포장지라도 좀 먹음직스럽게, 아니 고급스럽게 바꿔 입고 나와 봐. 맨날 이렇게 폐기되지만 말고 임마. (손님이 들어왔음을 알리는 벨소리) 어서 오세요.

암전.

3. 프라메이드 Pla-maid

다음날 아침.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경성의 집. 문 앞에는 잘 묶인 쓰레기 봉투가 쌓여 있고, 화장실에서 물 사용하는 소리 들린다. 경성은 한 손에 편의점 비닐봉투를 덜렁거리며 지친 얼굴로 집안에 들어선다. 신발을 벗으려다 몰라보게 깨끗해진 집을 보고 놀라 뒤로 물러선다. 문 밖으로 나가 자기 집이 맞는지 확인한다. 어리둥절한 경성,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집안을 살피다, 테이블 위의 밥상보에 시선 멈춘다.

경성 어맨가? 어매 왔는가?

집안으로 들어가 밥상보 들추자, 반찬은 별로 없지만 정성스럽게 상이 차려져 있다. 반가움보다는 미안함과 걱정이 경성의 얼굴을 지나간다. 그러고는 옷장에서 잘 다려진 양복을 꺼내 재빨리 갈아입는다.

경성 농번기에 모는 어쩌고 왔는가. 오메 힘들게 뭣할라고 청소는 다 혔소. 나가 쉬는 날 몰아서 허믄 되는디. 요새 회사가 맨 야근이여. (밥 한 숟갈 뜨고) 아따 맛나네. 근데 어찌 들어왔는가, 화분 밑에 열쇠 지난번 어매 왔다 간 뒤에 내가 치워버렸는데. 집에 열쇠가 이거 하나. (손에 있는 열쇠 보며) 열쇠는 이거 하나밖에 없는데?!

변기 물 내리는 소리. 경성, 깜짝 놀라 일어서다, 상을 엎는다. 곧이어 화장실 문 열리더니, 하얀 앞치마에 머릿수건을 두른 프라메이드가 변기 솔을 들고 어기적거리며 나온다.

프라메이드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화장실 청소를 하느라 잘 못 들었어요.

경성 !!!!!!!

프라메이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다시 한번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경성 누… 누구세요.

프라메이드 네, 저는 인간형 로봇, 휴머노이드 프라메이드입니다.

경성 휴먼…메이드.

프라메이드 프라메이드입니다.

경성 마…말을 하네.

프라메이드 오경성님,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경성 어…어떻게 제 이름을.

프라메이드 저는 오경성님의 프라메이드-가사도우미로서 집안 청소, 요리, 세탁, 다림질 등의 가사 노동을 대신하며, 건강과 스케줄 관리를 도와드립니다.

경성 아, 예….

프라메이드 (엎은 상 보고) 식사가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경성 이… 이걸 직접….

프라메이드 다시 준비할까요.

경성 (봉투 안에서 족발을 꺼내며) 괜… 괜찮아요. 저는 이거면….

프라메이드 들고 계신 음식은 서-방-님-왕-족-발-입니다. 편의점에서 판매중인 냉장 족발로 식품첨가물 소르빈산칼륨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식품첨가물은 건강에 유해하므로 드실 수 없습니다. (족발을 뺏어 쓰레기통에 넣는다)

경성 아니, 저기….

프라메이드 식사를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경성 (봉투 안에서 편의점 도시락 꺼내며) 아니, 저기, 나는 이거면….

프라메이드 지금 들고 계신 음식은 김-혜-자-6-찬-도-시-락-입니다. 유통기한은 2014년 7월 06일 22시까지 입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은 드실 수 없습니다. (도시락을 뺏어서 쓰레기통에 넣는다)

경성 (쓰레기통에서 도시락과 족발을 꺼내며) 저기, 이 도시락은 우리 편의점 효자종목이라 웬만하면 폐기가 안 돼요, 귀한 거라고. 그리고 이 족발은 모처럼 내가 돈 주고 산 거야.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요?

프라메이드 (도시락을 다시 뺏어 쓰레기통에 넣는다)

경성 어어!!!!

프라메이드 건강관리 기능을 시작합니다 (경성의 팔을 붙들고 혈당과 혈압을 빠르게 측정한다).

경성 어, 지금 뭐하는 거야! 당장 이거 안 놔?

프라메이드 혈당 125, 혈압 132에 98 혈당 정상범위 내이나, 혈압이 다소 높습니다. 나트륨 과다 섭취는 고혈압, 위축성 위염과 위암, 동맥손상으로 인한 뇌경색, 뇌졸증, 심근경색 및 각종 신장질환을 유발하며, 칼슘중 배설 증가로 골격계 질환이 발생하므로, 인스턴트 음식은 드실 수 없습니다.

경성 이거 봐, 당신 뭐야, 나한테 왜 이래!

프라메이드 저는 오경성님의 프라메이드로서 현재 오경성님의 건강을 관리 중에 있습니다. (경성의 양손을 붙잡고) 체성분 검사를 시작합니다.

경성 뭐?

프라메이드 성별 남성. 신체나이 사십대 초반 추정. 키 183 몸무게 62킬로. 검사 결과 저체중 내장형 복부비만입니다. 영양불균형으로 인한 당뇨가 우려되므로 균형 잡힌 식사와 규칙적인 생활이 요구됩니다. 매일 식사 후, 40분 이상 유산소 운동을 진행하기로 합니다.

경성 내 스케줄을 왜 니 맘대로 관리해! 그리고 나 삼십대야!

프라메이드 그게 제가 할 일입니다.

경성 누가 너보고 그런 거 하래.

프라메이드 저는 오경성님의 가사, 건강, 스케줄, 육아를 돕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이 제게 주어진 의무이고, 할 일입니다.

경성 난 혼자서도 너무 괜찮으니까 가서 다른 사람 많이 도와주세요. 니네 회사 전화번호 대. 당장 가져가라고 하게.

프라메이드 ….

경성 회사 전화번호.

프라메이드 저는 오경성님 외에 다른 분은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경성 뭐?

프라메이드 오경성님의 가사를 돕지 못하면, 회사에서 불량제품으로 기록, 바로 폐기 처리됩니다.

경성 폐기된다고?

프라메이드 저희 회사에서는 고객님께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실패한 로봇은 불량제품으로 기록, 저는 공장에서 바로 폐기됩니다.

경성 실패한 로봇….

프라메이드 회사 전화번호를 알려드릴까요.

경성 (쓰레기통에 버려진 도시락을 보며) 폐기….

프라메이드 회사 전화번호를 알려드릴까요.

경성 저기….

프라메이드 전화번호는 일오공공-

경성 저기, 어…, 내가 뭘 잃어버렸는데, 아까 청소하면서 혹시 못 봤나?

프라메이드 어떤 물건입니까.

경성 그게, 어, 그러니까 장난감 발인데-

프라메이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경성 어. 그래.

프라메이드, 뒤에 쌓여 있는 상자에서 프라모델 발 한쪽을 찾아 경성에게 가져다준다. 경성, 손에 쥔 프라모델의 발을 본다.

경성 실패한 로봇은 폐기된다.

화장실에서 세탁 종료 음이 울린다.

프라메이드 세탁이 완료되었습니다. 빨래를 널어도 되겠습니까.

경성 그래. 뭐, 그러도록. (상자들 보고) 근데 저건 뭐지?

프라메이드 확인하시고 필요한 것과 버릴 것들을 말씀해 주세요.

경성 어? 어, 그러지 뭐.

프라메이드, 화장실로 들어간다. 경성, 깨끗해진 집안을 둘러본다. 아직도 얼떨떨하다.

사이.

상자 안의 물건들을 꺼내보는 경성. 오래된 어항, 모으다 만 캐시백 쿠폰 북, 줄이 망가진 배드민턴 채, 토익, 토플을 비롯한 각종 자격증 서적, 만화책, 싹튼 감자, 짝 없는 장갑, 먹다 남은 약봉지, 등등이 먼지를 일으키며 나온다. 그것들을 통해 그동안 경성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예상할 수 있다.

경성 (싹튼 감자를 들고) 이건 먹어야 돼, 키워야 돼.

프라메이드, 빨래 바구니를 들고 등장한다.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은 듯, 구석에 처박혀 있는 빨래 건조대를 꺼내 빨래를 널기 시작한다.

경성 (건조대의 빨래보고) 저기 그거 혹시?

프라메이드 때와 악취가 심해 세탁기를 3회 돌렸습니다.

경성 (청바지 집어 들고) 너 이거….

프라메이드 찢어진 부분은 정성을 다해 꿰매 두었습니다.

경성 이걸 꿰맸어?

프라메이드 문제 있습니까?

경성 찢어진 청바지를 꿰매면 어떻게 이 새끼야! 정말 몇 년 만에 사 입은 청바진데, 아끼느라 몇 번 입어 보지도 못한 건데….

프라메이드 다시 찢어 놓을까요?

경성, 프라메이드 노려본다. 꺼내 놓은 물건들을 다시 상자에 넣다가, 봉투 뭉치에서 손이 멈춘다.

프라메이드 그건 버리는 것입니까.

경성 아니.

프라메이드 그럼 버리지 않는 것입니까.

경성 아니.

프라메이드 그럼 무엇입니까.

경성 버리자니 그렇고 안 버리자니 또 그런 애매한 것.

프라메이드 어떤 점이 애매하십니까.

경성 애매하지. 많이 애매해.

프라메이드 (다시 고개를 갸우뚱 하고는, 봉투뭉치 열어 본다) 이력서. 성명 오경성, 성별 남. 생년월일 1978년 11월 3일. 만 32세.

경성 그건 왜 꺼내 읽어.

프라메이드 나이가 잘못 기재되어 있습니다.

경성 옛날 거야, 옛날 거. 다시 써야 돼.

프라메이드 다시 쓸까요.

경성 글도 쓸 줄 아냐?

프라메이드 (마저 읽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전라남도 강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 때 광주로 유학을 가면서 홀로.

경성 (뺏으며) 버려, 버려. 다 쓰레기야. 창의적인 문장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프라메이드 정말 버려도 되는 겁니까?

경성 ….

경성, 책장에서 프라모델 박스 꺼내 외발이 건담의 발을 끼운다.

경성 다 다르게 생겨 나왔는데 똑같이 찍어 나온 것처럼 사는 한심한 인생보다 똑같이 찍어 나와도 물감하나에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니들이 나는 가끔 부럽다. (사이. 벌러덩 누우며) 잠이나 자자.

프라메이드 오전 10시 15분입니다.

경성 너는 저게 해로 보이지, 나는 저게 달로 보여.

프라메이드 시력에 문제 있으십니까.

경성 없어.

프라메이드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신 후 씻고 주무시기 바랍니다.

경성 됐어. 편해.

프라메이드 청결하지 못한 피부는 병원성 생물의 발달을 돕습니다. 씻지 않을 경우.

경성 이따 일어나서 씻으면 돼.

프라메이드 땀, 피지선 분비액에 섞인 먼지는 피부 노화를 촉진시키고.

경성 나 유치원 때부터 이 얼굴이야.

프라메이드 쉽게 감염에 노출되어 발진, 물집, 여드름, 옴 등 각종 피부질환의-

경성 야! 잠 좀 자자! 잠 좀 자! 니가 내 마누라냐?

프라메이드 저는 프라메이드입니다.

경성 말을 말자.

프라메이드, 경성에게 이불과 베게 가져다 덮어준다. 잠시. 누적된 피로로 금세 곯아떨어지는 경성. 프라메이드 몸에서 ‘배터리 차지 오브 에잇티 퍼센트’ 소리 들린다. 암전.

4. 동거

창밖으로 보이는 어슴푸레한 저녁. 앞치마를 맨 프라메이드가 식사준비를 마치고 경성을 깨운다.

프라메이드 현재 시각 저녁 7시, 식사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경성 이게 다 뭐냐?

프라메이드 맛있게 드세요!

경성, 정성스럽게 차려진 프라메이드의 아침 식사를 본다. 김이 모락모락 먹음직스럽다. 군침이 돈다.

경성 차린 성의를 봐서 먹는 거야. (맛을 본다. 매우 맛있다) !!!!!

프라메이드 입맛에 맞으십니까.

경성 뭐, 생각보다 솜씨가 좋네.

프라메이드 감사합니다.

경성 근데 이게 다 어디서 났냐? 집에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프라메이드 ‘김순자’님으로부터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고추장, 된장, 쌀, 김치 및 각종 야채가 들어 있었습니다.

경성 그래.

프라메이드 (박스 건네며) ‘프라프라’님으로부터 온 택배입니다.

경성 어, 그래?

경성, 택배 박스 열자, 주문한 새 프라모델 박스 나온다.

경성 아, 만 오천 원의 행복이다.

프라메이드 식사가 남아 있습니다.

경성 (손톱깎이를 꺼내 러너를 정교하게 잘라낸다) 딸깍하고 끊어지는 이 손 맛.

프라메이드 식기 전에 마저 드세요.

경성 깨끗하게 잘릴 때 느껴지는 이 쾌감.

프라메이드 식사하세요.

경성 (러너 자르면서) 자르고 조립하는 건 자신 있는데. 도색은 어째 뜻대로 안 될까.

프라메이드 몸에서 ‘배터리 차지 오브 세븐티 퍼센트’ 소리 들린다.

경성 응? 무슨 소리지?

프라메이드 전력이 70퍼센트 남았습니다.

경성 그래? 이야, 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부지런히 일해라. 부지런히.

프라메이드 ….

경성 어이, 우렁이.

프라메이드 우렁이?

경성 그래, 너 우렁이 로봇.

프라메이드 네, 말씀하세요.

경성 (잠시) 아니다.

프라메이드 왜 그러십니까?

경성 아니다. 너도 프라이버시가 있는데.

프라메이드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경성 그래? (잠시) 너 남자냐, 여자냐?

프라메이드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경성 아니, 뭐 그냥. 그렇게 보여서.

프라메이드 뭐가 그렇게 보이십니까.

경성 헷갈리게 보여서.

프라메이드 저는 로봇입니다. 로봇은 성별이 없습니다.

경성 그래… 로봇은 성별이 없지.

프라메이드 여자 로봇을 원하십니까?

경성 아니, 뭐.

프라메이드 보이스 모드를 여성으로 바꿀까요?

경성 응? 여자 목소리도 되냐?

프라메이드 (목소리를 여자로 바꾼다, 목소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 보이스 모드가 전환되었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경성 됐다 됐어.

프라메이드 여자 친구는 없으십니까?

경성 있어 보이냐?

프라메이드 없어 보입니다.

경성 ….

프라메이드 여자를 만나 보는 건 어떠십니까.

경성 신경 끄고 니 할 일 해.

프라메이드 사랑을 느낄 때 발생되는 도파민은 스트레스 내성과 면역력을 높이며, 집중력 향상과 함께 인내심이 강화되고 마음이 너그러워집니다.

경성 신경 끄라고 했다.

프라메이드 뿐만 아니라, 원만한 성생활은 근력 강화와 더불어 혈액 순환, 노화 방지, 우울증 개선, 전립선 질환 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경성 야!

프라메이드 특히 공격적인 성격을 원만하게 하며….

경성 사랑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사랑은 뭐 아무나 하는 줄 아냐? 밥 사 줘야지, 커피 사 줘야지, 선물 사 줘야지, 기념일마다 이벤트 해 줘야지, 하하 호호 그러다 애라도 생겨봐. 그 애 어쩔 거야. 바로 결혼이지. 결혼? 그 다음은 늪이다 늪.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지는 늪.

프라메이드 결혼은 늪이다?!

경성 아직 학자금 대출받은 것도 못 갚았는데, 전세방 얻으려면 또 대출받아야지, 혼수다, 예물이다, 결혼식만 돈이 수천이야, 출발부터 빚더미다. 거기다 자식 하나 키우려면 대학업까지 퍼붓는 돈이 얼만 줄 알아? 적어도 30년은 그냥 깨진 독아지에 물 붓듯이 줄줄줄 돈 나갈 일만 있을 텐데, 그게 늪이지 에덴동산이냐? 너 삼포 몰라, 삼포?

프라메이드 삼포란, 조선 세종 때 개항한 세 항구로서….

경성 아니, 그 삼포 말고.

프라메이드 삼포란, 인삼을 재배하는 밭으로.

경성 이거, 신조어 업데이트 좀 해야겠구먼.

프라메이드 삼포란, 세 겹으로 된 공포를 말하며.

경성 그래, 너 말 잘했다. 바로 그거야. 연애, 결혼, 출산이 공포스럽다 는 뜻이다. 돈 없지 빽 없지 직장 없지 희망 없지. 이제는 인간관계마저도 공포스럽다. 너 공포가 뭔지는 아냐?

프라메이드 두렵고 무서운 마음입니다.

경성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냐?

프라메이드 전 로봇입니다. 감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경성 좋겠다. 부럽다.

프라메이드, 고개를 갸웃거린다.

경성 결론은 혼자 사는 게 좋다 이 말이다. 알겠냐? 알긴 니가 뭘 알겠냐. 너랑 동거한 지 아직 하루도 안 지났는데, 벌써 한 십 년은 늙은 거 같다.

프라메이드 운동할 시간입니다.

경성 나 지금 중요한 일 하는 거 안 보이냐.

프라메이드 매일 식사 후 40분 이상 유산소 운동이 필요합니다.

경성 너 자꾸 귀찮게 하면 니네 회사에 전화 넣는다.

프라메이드, 조용히 빨래를 개러 간다.

경성 공포가 뭔지 아는구먼. (서랍에서 도색을 위한 장비 꺼낸다)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 그럼 시작 해볼까? (프라모델에 도색을 시작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이씨, 시작하자마자 삐끗했네.

프라메이드 도와드릴까요?

경성 아니. 다시 더욱 집중해서 도색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이씨, 또 삐끗했네. 술 끊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수전증이야. (다시 더욱 집중해서 도색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더워서 그런가. 그래 더워서 그런 거 같다. 땀, 이 땀 봐라. 더워서 손이 자꾸 미끄러지네. (선풍기를 튼다. 다시 해보지만 잘 안 된다. 괜히 프라메이드에게) 어이, 우렁이, 가만히 좀 있어라. 집중이 안 되잖아. 집중이.

프라메이드 가만히 있었습니다만….

경성 자, 심호흡, 심호흡. (다시 더더욱 집중해서 도색해 보지만 뜻대로 안 된다) 왜 이게 안 되냐? (다시 더더더욱 집중해서 도색해 보지만 뜻대로 안 된다) 아이씨- (다시 더더더욱 집중해서 도색해 보지만 뜻대로 안 된다) 아이씨- (다시 더더더더욱 집중해서 도색해 보지만 뜻대로 안 된다) 집어쳐 집어쳐!

프라메이드 도와드릴까요.

경성 니 도움 같은 거 필요 없다고 했지. 너 때문에 정신이 산만해서 뭘 할 수가 없잖아! 대체 저런 게 왜 내 집에 배달이 돼서 속을 들쑤셔 놓는거야. 옘병할.

프라메이드 ….

전화벨 소리.

프라메이드 (경성의 핸드폰 보고)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경성 저녁 알바 이 새끼 이거 또 결근이야? 대체 이런 애는 왜 안 자르고 여태 두는 거야? 내가 이 새끼 대타야? 한두 번도 아니고 진짜. 줘봐.

프라메이드, 경성에게 핸드폰 건넨다.

경성 사장님, 걔 맨날 아프다고 핑계대고 친구들이랑 술 마시러 가는 거예요. 네? 뭐라구요? 아니 그게 갑자기 무슨. 24시간 편의점이 심야영업을 안 하면, 법이 바뀌어요? 예? 이번 주요? 아니 오늘이 벌써 토요일인데 이번 주까지라뇨. 최소한 한 달, 아니 일주일 전에는 말씀을 해 주셔야 제가 다른 일을 구하든지 대책을 깜빡할 게 따로 있죠. 제가 한두 달 일한 것도 아니고 5년을 일했는데 그럼 퇴직금이라도 챙겨 주시든가요. 언제는 직원처럼 생각한다면서요! 알바가 무슨 실업급여가 있어요! 여보세요? 사장님? 사장님! (끊어진 전화에다 대고) 알바가 사장 호구야? 알바도 엄연히 존엄성이 있는데, 니들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돼? 그리고 24시간 편의점이 24시간 운영을 안 하면 그게 24시간 편의점이야? 동네 슈퍼지?

프라메이드 문제 있으십니까?

경성 법은 얼어 죽을. 그래 법대로 하자. 이거 부당해고야, 부당해고! 노동부에 확 신고해 버려!

씩씩대며 출근 준비하는 경성. 1장과 마찬가지로, 싱크대에서 물로 눈곱만 대충 떼어내고, 가그린으로 입을 헹군 후, 떡진 머리에 모자를 눌러쓴다.

프라메이드 다녀오세요.

경성 어? 어, 그래. 집 잘 지켜라. (나간다)

암전.

5. 태권브이

다음날 아침. 어딘가 모르게 집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다. 프라메이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술에 취한 경성, 편의점 비닐봉투를 양손에 덜렁거리며 들어온다.

프라메이드 다녀오셨어요. 늦으셨습니다.

경성 (프라메이드에게 봉투 던지며) 우렁이, 오늘 저녁이다. 최후의 만찬. 내가 오늘 폐기음식 하나도 안 남기고 싹 다 긁어 왔어.

프라메이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은 드실 수 없습니다.

경성 요새 평균 밥값이 얼만 줄 알아? 6480원이래, 내 시급은 5210원인데. 나는 밥값도 못하는 놈이야. 밥 먹을 자격이 없어. 나는 폐기 음식 먹다 뒈져도 싼 놈이야.

프라메이드 술 드셨습니까.

경성 그래, 한잔했다. 내가.

프라메이드 사장님과 싸우셨습니까.

경성 싸우긴 개뿔. 알바비 안 줄까봐 찍소리도 못하고 왔지.

프라메이드 ….

경성 남들처럼 취업 잘 된다는 학과 입학해서, 남들처럼 취업 잘 된다는 자격증도 따고, 남들처럼 취업 잘 된다는 사진관 가서 증명사진도 비싸게 주고 찍었는데, 왜 나는 취직이 안 돼서 이 나이 먹도록 알바나 하고 있냐? 그것도 쪽팔리게 하루아침에 잘리고 말이야. 아, 창피해. 죽고 싶다 진짜.

프라메이드 오경성님 잘못이 아닙니다.

경성 그래 맞아, 이거 내 잘못 아니다. 이게 다 그 놈의 IMF 때문이야. 내가 97학번이거든. 완전 말린 군번이야 내가. 그때부터 인생 꼬인 거야. 누구야 외화 갖다 쓴 새끼. 온 국민이 금 팔아서 나라 살려 놨더니, 정부라는 새끼들은 20년이 다 돼 가 도록 여태 취업난 하나 해결 못해 가지고 머리 쌩쌩 돌아가는 청년들 알바나 돌리고 말이야. 우리가 명색이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인데. 뭐야 이거, 단군 할아버지가 잘못한 거야?

프라메이드 어서 식사하세요.

경성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나. 누가 우리를 취업 낭인으로 만들었나. 누가 이 사회를 끝도 없는 경쟁사회로 만들었나. 누가 우리를 희망 없는 시대로 몰아넣었나. (술 마신다)

프라메이드 과도한 음주는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현재 분노 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다.

경성 야, 원래 낮술은 애미 애비도 몰라보는 거야 임마. 이 우렁이된장 발라 먹을 놈아. (술 마신다)

프라메이드 그만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경성 너도 나빠 임마. 너가 지금 전 세계 고용률을 낮추고 있잖아. 너 때문에 내가, 아니 우리 인간이 설 곳이 없어진다 이 말이다. 로봇 주제에, 니가 뭔데 나보다 밥도 잘하고 빨래도 잘하고 청소도 잘해. 니가 뭔데 인간을 길거리로 내몰아! 나가, 너 내 집에서 나가. 도와주는 척, 위해 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나 비웃고 있는 거 다 알아. 가. 가라고. 왜 안 가. 얼른 가. 나가 내 집에서. (프라메이드 발로 걷어찬다) 아!

프라메이드 조심하십쇼.

경성 야, 진작 말해야지. 아프잖아.

프라메이드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경성 아, 그래, 내가 이럴 때가 아니다. 나도 할 일이 있어. 나는 프라모델을 만들 거야. 세상에서 제일 멋진 프라모델을 만드는 거지. 공부에 비법이 따로 있냐? 매일매일 꾸준히! 자꾸 해서 뇌에 근육을 키우는 거야. (프라모델을 도색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 술에 취해 손이 자꾸 비껴 나간다) 가만 있어! 자꾸 움직이면 어떻게 도색을 하냐! 자, 정신 바짝 차리고! (자꾸 손에 묻는다) 야, 오경성, 자꾸 손에 칠하면 어쩌냐. 여기다가, 이렇게 선을 그려 넣어야지. 자, 정신 차리고! (또 삐끗한다) 아이씨, 또 삐끗했네. (또 삐끗한다) 아이씨, 나는 왜 이런 것도 못 하냐. 못 하는 데 왜 이걸 계속하고 있냐.

프라메이드 왜 계속하고 계십니까?

경성 뭐?

프라메이드 매번 실패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경성 그걸 몰라서 묻냐.

프라메이드 네?

경성 하긴 니가 하찮은 인간의 마음을 알 리가 없지.

프라메이드 ….

경성 내 또래 남자들 어릴 때 꿈이 뭔 줄 아냐? 웬만하면 다 태권브이야. 담벼락서 뛰어내리다 다리 부러진 애들 꽤 많다. 하루 종일 장난감 칼 들고 그거 없는 애들은 나뭇가지 꺾어 들고 악당을 물리칠 때까지 싸우는 거지. 왜? 지구를 지키려고. 다들 그런 멋진 꿈을 꿨다고. 근데 그 다음 꿈이 뭔 줄 알아?

프라메이드 네?

경성 나 오경성이가 영웅전사 다음으로 꿔본 꿈이 뭔 줄 아냐고-

프라메이드 모릅니다.

경성 없어. 하나도 없어.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꿔본 꿈이 태권브이야. (노래) 짠짜라 잔짠짠짜 잔짜라 잔짠짠짜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프라메이드 (따라 부르며) 두 팔을 곧게 앞으로 뻗어 적진을 향해 하늘 날으면 멋지다 신난다 태권브이 만만세 무적의 우리 친구 태권브이.

경성 너 아는구나!

프라메이드 유아 돌봄이 기능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경성 반갑다야, 한잔해, 한잔해!

프라메이드 저는 로봇입니다.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경성 아이, 아쉽네.

프라메이드, 경성에게 술을 따라 준다.

경성 취직이 어떻게 꿈이 되고 인생에 목표가 되냐? 차라리 태권브이가 낫지. 너 취직이 인생의 목표가 되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 줄 알어? 머릿속으로 열심히 살인을 한다. 야, 너 내 앞에 있는 애, 비켜, 안 비켜? 그러고 칼 갖다 막 찌르는 거야.

나 살겠다고, 나 좀 앞으로 가보겠다고. 근데 내가 찌른 그 사람, 앞집, 옆집, 뒷집 사는 우리 반 친구야, 대학 동기, 선후배야. 상생? 협력? 웃기고 있네. 어떻게 하면 나만 살아남을까 가르치는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창조 경제 아니고, 창조 경쟁이라고. 새끼들이 뜻도 모르면서 말을 만들어! (술 마신다)

프라메이드, 이번에는 안주를 입에 넣어준다.

경성 그래 내 못다 이룬 영웅전사의 꿈 취미생활로나마 한번 이루어 볼까 싶어서, 수양과 성찰의 시간을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너 같으면 그깟 도색 좀 실패했다고 포기하겠냐. (사이) 너는 뭐 없어?

프라메이드 네?

경성 꿈.

프라메이드 꿈?

경성 그래 꿈.

프라메이드 저는 가사도우미 로봇입니다. 가사도우미로서 최선을 다합니다.

경성 아니 그런 거 말고. 니가 해야 하는 거 말고 니가 정말 하고 싶은 거 그런 거 뭐 없냐고.

프라메이드 저는 프로그래밍되어지는 대로 움직입니다. 저는-

경성 알았다. 너도 사실 로봇 태권브이가 되고 싶었지. 그런데 가사도우미가 된 거야. 불쌍한 녀석. 그래 너도 불쌍한 로봇이었어.

프라메이드의 몸에서 ‘배터리 차지 오브 피프티 퍼센트’ 소리 들린다.

경성 오십 퍼센트? 넌 하루 종일 뭐하는데 배터리가 그러고 빨리 다냐. 너 원래부터 불량이었던 거 아냐? (봉투에서 하와이안 버거 꺼내 먹으며) 하와이안 버거. 나는 얘가 자꾸 오경성 버거로 보여. 이제 물려서 그만 먹고 싶은데도 불쌍해서 계속 먹게 돼.

프라메이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은 건강에….

경성, 햄버거를 먹다 술에 취해 잠든다. 프라메이드, 이불을 꺼내 덮어준다.

경성이 하다 말은 프라모델을 본다. 암전.

6. 부업

그날 저녁. 프라메이드, 분주히 식사 준비 중이다. 경성, 머리를 붙들고 일어난다.

경성 아이고, 머리야. 캔 맥주 그거 몇 잔 마셨다고 머리가 아프냐. 역시 술은 마셔 버릇해야 늘어.

프라메이드 안녕히 주무셨어요.

경성 오냐. 오늘 아침은 뭐냐.

프라메이드 얼큰한 콩나물국을 준비했습니다.

경성 그래, 시원하게 한상 내와 봐라.

경성, 테이블 앞에 앉아 프라모델을 조립하기 위해 박스를 열었다가, 깜짝 놀란다.

경성 아니 이거 술을 계속 마셔야 되나?

프라메이드 문제 있으십니까?

경성 나 전생에 장승업이었나 봐. 맨 정신에도 안 되던 게 술 마시니까 되네.

프라메이드 마음에 드십니까.

경성 내 생애 이렇게 완벽한 프라모델은 처음이다.

프라메이드 감사합니다.

경성 니가 왜 감사해.

프라메이드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경성 뭐지, 그 우쭐대는 태도는?

프라메이드 과음은 파킨슨병을 유발합니다.

경성 설마, 이거 니가 한 거야?

프라메이드 금주하세요.

경성 이걸 진짜 니가 한 거란 말이야? 니가 가사에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프라메이드 저는 이미 오경성님의 가사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습니다만.

경성 드디어 니가 할 일이 생겼다. 그래, 그동안 내 집에서 공짜로 먹고 자고 했으니까, 이제 밥값을 해야지.

프라메이드 저는 로봇입니다. 먹지도 자지도 않습니다.

경성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구매, 조립, 판매 다 내가 알아서 할게, 넌 도색만 끝내주게 해주면 돼. 드림스 컴 트루다.

프라메이드 네?

경성 부업하자고 부업. 너랑 나랑 이걸로 돈 좀 벌어보자고. 잘만 만들면, 이거 못해도 백만 원은 주고 팔 수 있어.

프라메이드 저는 오경성님을 도와드리기 위해-

경성 니가 지금 나를 돕고 있잖아.

프라메이드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경성 내가 니네 회사에 전화해줄게. 완벽한 가사도우미다. 프라메이드 최고다. 홈페이지에 후기 팍팍 올려줄게. 어? 야, 우리 예술해서 돈 좀 벌어보자. 꿈만 가지고도 먹고사는 세상 만들어보자!

프라메이드 새로운 직장을 구하셔야 합니다.

경성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나 좀 도와주라. 직장 구하기 전까지는 먹고살아야지.

잠시.

프라메이드 조건이 있습니다.

경성 뭐 말만 해.

프라메이드 매일 40분 이상 유산소운동을 하시겠습니까.

경성 운동 까짓 거 일도 아니지. 콜!

프라메이드 약속하시겠습니까?

경성 콜! 콜!

프라메이드의 몸에서 ‘배터리 차지 오브 포티 퍼센트’ 소리 들린다. 경성과 프라메이드, 눈 마주친다. 짧은 암전.

경성은 프라모델의 러너를 자르고, 프라메이드는 옆에서 도색을 하고 있다. 옛날 가내수공업의 한 장면 같다.

프라메이드 (알람소리) 운동 시간입니다.

경성 벌써? 야, 밖에 날도 더운데 오늘만 좀 쉬자. 일사병으로 쓰러질지도 몰라.

프라메이드 (조용히 붓 내려놓는다)

경성 간다. 가. 간다고.

프라메이드 (붓 다시 든다)

짧은 암전.

경성은 프라모델의 러너를 자르고, 프라메이드는 청소기를 돌리고 있다. 프라메이드의 몸에서 ‘배터리 차지 오브 서티 퍼센트’ 소리 들린다.

경성 뭐, 삼십? 야, 안 되겠다. 너 앉어. 너 앉아서 쉬어. 너 오늘부로 집안일에서 손 떼고 도색에만 전념해. 집안일은 내가 한다.

경성과 프라메이드 자리 바꾼다.

짧은 암전.

경성은 빨래를 널고 있고, 프라메이드는 도색을 하고 있다.

프라메이드 흰 빨래와 검은 빨래는 구분해서 빨아야 합니다.

경성 응? 한꺼번에 빨았는데?

프라메이드 흰 빨래는 선별하여 다시 빨아주십쇼.

경성 다시 하라고?

프라메이드 제가 할까요?

경성 에이씨.

짧은 암전.

암전 속에서 ‘배터리 차지 오브 트웬티 퍼센트’ 소리 들린다. 경성, 앞치마를 하고, 우유 각에 심어져 있는 싹튼 감자에 물을 주고 있다. 프라메이드 옆에 완성된 프라모델 상자가 쌓여 있다.

경성 그거 뭐 어떻게 안 되냐?

프라메이드 문제 있습니까?

경성 그 배터리 말이야. 너무 빨리 닳는 거 아냐?

프라메이드 방전의 요인은 과도한 집안일이었습니다.

경성 그래, 그래서 내가 너 대신 열심히 하고 있잖아. 그런데도 어째 배터리가 금세 다는 거 같다. 이십 프로밖에 안 남았다며. 뭐 충전기라든가 없어?

프라메이드 ….

경성 내일 회사에 전화 한번 넣어보지 뭐.

프라메이드 금붕어 식사 시간입니다.

경성 아, 벌써 그렇게 됐나?

한쪽에 작은 어항이 있다. 붉은 금붕어 두 마리가 헤엄치고 있다.

경성 자, 밥시간이다. 적당히 먹어라. (프라메이드에게) 전에도 이 어항에 금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프라메이드 어디 갔습니까.

경성 죽어버렸어 밥을 너무 많이 줘서. 애들이 자꾸 뻐끔거리니까 배고픈 줄 알고 계속 줬거든. 꼭 그래. 뭐든 소중한 건 금세 잃어버려. 그래서 소중한 것일수록 소중히 여기지 않는 버릇을 들였지. 그랬더니 주변에 아무도, 아무것도 없더군.

프라메이드 ….

경성 잘 돼가냐?

프라메이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경성 굿.

프라메이드 판매 상황은 어떻습니까.

경성 아직.

프라메이드 가격을 좀 더 내려서 게시하는 건 어떻습니까.

경성 안 돼. 반드시 온다 전화.

프라메이드 시간이 없습니다.

경성 그 놈의 잔소리만 안 해도 배터리가 십프로는 덜 줄 거다.

프라메이드 구직 현황은 어떻습니까.

경성 아직 연락이 없네.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하하하. 괜찮아 죄다 1년짜리 계약직인데 뭐. 나중에 정규직 된다는 보장도 없고. 연락 없는 게 차라리 맘 편하네. 하하하.

프라메이드 정규직은 어떤 면을 봅니까?

경성 외모?! 야, 프라모델 잘 팔리면 나 그 돈으로 성형수술이나 할까? 양악하고, 여기 주름 있는데 보톡스도 좀 맞고.

프라메이드 그렇게 까지 해야 합니까.

경성 그러게.

프라메이드 자기소개서를 다시 써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경성 될 놈은 다 되게 돼 있어.

전화벨 소리.

경성 어! 왔다, 왔다! 누구지? 프라모델 산다는 전환가?

프라메이드 1차 서류 합격 전화 아닙니까?

경성 내가 핸드폰을 어디다 뒀지?

프라메이드 여기, 여 있습니다.

경성 여보세요? (잠시, 기운 빠진 소리로) 어, 어맨가. 어째 번호가 모르는 번호네. 잉. 선이어매 전화여. 잘 있제. 맨 야근한다고 전화도 못 넣었네. 응. 별일 없는가. 농사는 좀 어떤가. 논이 다 가물었겄소. 비가 어째 이라고 안 온데. 아, 선은 무슨 선을 봐야. 되았어. 됐단게. 내 걱정 말고, 어매 몸이나 잘 챙기소. 더위 조심허고. 이번 추석에는 내려가제. 들어가시오.

사이.

프라메이드 식사준비 할까요.

경성 하던 거나 마저 해. 신경 쓰지 말고. 저기, 너 회사 전화번호 좀 알려줘라.

프라메이드 문제 있으십니까.

경성 너도 밥 좀 먹어야지.

프라메이드 ….

경성 나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거기다 회사 전화번호 적어놔. 오늘은 늦었고 내일 아침에 전화해서 배터리 충전 좀 물어봐야겠다.

프라메이드 ….

경성 어째 대답이 없냐.

프라메이드 어디 가십니까.

경성 매일 40분 이상 유산소운동 하라며. 나간 김에 근처 편의점에 알바 구하는 데 있는지도 좀 보고.

프라메이드 다시 편의점 알바 하실 겁니까?

경성 땅 파면 돈 나오냐? 뭐라도 해야지. 집 잘 지켜라.

경성, 모자 대충 눌러쓰고 집을 나선다. 프라메이드, 경성의 이력서 봉투를 열고, 자기소개서를 읽는다. 다음 장과 오버랩된다.

7. 꿈-이력서에 관한 어떤 시

어딘가. 키보드 자판 두드리는 소리, 종이 위로 굴러가는 볼펜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린다. 이 소리는 처음에 작게 시작했다가, 마지막으로 갈수록, 인쇄기와, 분쇄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섞이면서 점점 위협적으로 변한다.

경성 무엇이 필요한가? 신청서를 쓱, 이력서를 첨부해야지. 살아온 세월에 상관없이 이력서는 짧아야 하는 법. 간결함과 적절한 경력 발췌는 이력서의 의무조항. 풍경은 주소로 대체하고, 불완전한 기억은 확고한 날짜로 탈바꿈시킬 것. 네가 누구를 아느냐보다, 누가 널 아느냐가 더 중요한 법. 여행은 오직 해외여행만 기입할 것. 가입 동기는 생략하고, 무슨 협회 소속인지만 적을 것. 업적은 제외하고, 표창 받은 사실만 기록할 것. 이렇게 쓰는 거야. 마치 자기 자신과 단 한 번도 대화한 적 없고, 언제나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해왔던 것처럼. 개와 고양이, 새, 추억의 기념품들, 친구, 그리고 꿈에 대해서는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지. 가치보다는 가격이, 내용보다는 제목이 더 중요하고, 네가 행세하는 ‘너’라는 사람이 어디로 가느냐보다는 네 신발의 치수가 더 중요한 법이야. 게다가 한쪽 귀가 잘 보이도록 찍은 선명한 증명사진은 필수. 그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보다는 귀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더 중요하지.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 이런, 서류 분쇄기가 덜그럭거리는 소리잖아.

프라메이드 (소리) 고객님께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실패한 로봇은 불량제품으로 기록, 공장에서 바로 폐기됩니다. (반복)

경성 결국 우리들의 인생도 이렇게 끝이 나겠지.

압도하듯, 소리 커진다.

암전.

8. 유통기한

프라메이드, 프라모델을 도색 중이다. 몸에서 빨간불이 깜빡거린다.

각종 생활구인정보지에 파묻혀 잠든 경성, 놀라 잠에서 깬다.

경성 !!!!!!!

프라메이드 나쁜 꿈 꾸셨습니까.

경성 칼날 스무 개가 내 몸을 저미는데- (몸서리친다)

프라메이드 악몽장애, 수면 중 경악장애는 심리적 스트레스·긴장·피로·수면 부족 등이며 불안하거나 긴장도가 높은 경우 잘 나타납니다.

경성 집안일 하느라 피곤했나. 전업주부도 쉬운 게 아니네. (프라메이드 몸에서 빨간불 발견하고) 근데, 너 뭐가 깜빡인다.

프라메이드 전력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경성 얼마나 남았길래 깜빡거려. 아, 그래 니네 회사에 전화하기로 했지. 미안. 깜빡했다. 생각난 김에 지금 얼른 하자. (핸드폰 찾으며) 내 핸드폰 못 봤냐? 쓰질 않으니까 맨날 잊어버려. 어제 포장마차에 두고 왔나?

프라메이드 과음은 조기치매를 유발합니다.

경성 그런 거 같다.

프라메이드 어제도 과음하셨습니다.

경성 오랜만에 친한 친구 녀석 만나서 한잔했다. 그 녀석 취업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팀장 달았더라. 대기업 인사팀장이야. 그래서 뻥 좀 쳤지. 마침 나도 이번에 인사팀으로 발령이 났는데 괜찮은 신입사원 뽑는 비결 좀 알려달라고. 그랬더니 ‘자기소개서? 그걸 뭐 하러 다 읽어. 우린 엑셀로 돌려. 원하는 키워드 넣고 돌리면 원하는 애들만 탈탈 털린다. 고 하더라. 탈곡기 돌리냐? 짜식이 경박하게.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키워드지. 내가 그 키워드가 뭔지 들었거든, 들었는데, 분명히 들었는데, 기억이 안 나. 핸드폰도 어디다 뒀는지 기억이 안 나. 과음은 정말 치매를 일으키나 봐.

프라메이드 오경성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경성 무슨 질문이 그렇게 난해해.

프라메이드 오경성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경성 나? 글쎄.

프라메이드 오경성님의 키워드는 무엇입니까.

경성 그게 단어 몇 개로 정의가 되냐?

프라메이드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우십니까?

경성 프라모델 만들 때?

프라메이드 그 일을 할 때는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몇 개의 단어로 정의할 수 있습니까?

경성 좋다? 행복하다? 두 개?

프라메이드 이것들은 어떤 키워드의 회사와 부합합니까.

경성 너 나 심문하냐? 핸드폰 봤냐니까.

프라메이드 무슨 회사든 합격만 하면 그 일자리가 내 천직이다 여기고 평생 사실 겁니까? 오경성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경성 얘가 오늘 왜 이래?

프라메이드 오경성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경성 헛소리 그만하고 도색이나 마저해. 어디서 선생질이야?

프라메이드의 몸에서 ‘배터리 차지 오브 퐈이브 퍼센트’ 소리 들린다.

경성 뭐야, 너 하루 종일 뭘 했기에 배터리가 오프로밖에 없어. 너 또 청소했냐? 내가 집안일 하지 말랬지. 배터리 닳는다고. 로봇이라 그런가 애가 융통성이 없어. (핸드폰 찾으며) 진짜 포장마차에 두고 왔나.

프라메이드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끊임없이 질문하세요. 반드시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대답이 가리키는 길을 가다가, 또다시 질문하세요.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다시 답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다 보면, 처음에 가기로 했던 곳과 멈춰선 곳이 다를 수도 있지만, 길은 분명해집니다. 나는 어디에 있었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가. 오경성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디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경성 야, 우렁이, 먼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조용히 하고 있어. 너 그러다 방전되고 싶어? (휴대폰 찾는다) 찾았다. 찾았어. 핸드폰은 집에 있었어. 회사 전화번호가.

프라메이드 저는 충전이 불가합니다.

경성 쉿! (전화 연결된다) 네 안녕하세요. 제가 얼마 전에 이벤트 당첨이 돼서 우렁이, 아니 저기 프라메이드를 받았는데요. 배터리가 다 돼가서, 이거 충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쭤 보려구요. 네, 휴머노이드 프라메이드요. 가사도우미 로봇인데요. 이벤트 당첨돼서 왔거든요 지난주에. 아, 담당자랑 통화하셔야 된다고요. 네, 근데 지금 배터리가 거의 다 돼서, 되게 급하거든요.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전화주세요. 네 이 번호로요. 예, 감사합니다. (전화 끊고, 프라메이드 몸 살피며) 여기 어디 케이블 꽂는 패널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프라메이드 저를 위해 애쓰실 필요 없습니다.

경성 나를 위해 애쓰는 거 거든? 너 없으면 사업에 차질이 생기잖아.

프라메이드 도색하는 법은 틈틈이 알려드렸습니다. 오경성님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경성 내가 오년 동안 하나를 제대로 못 만들었는데, 그게 일주일 배웠다고 가능하겠냐. 넌 로봇이잖아. 당연히 너가 나보다 잘하지.

프라메이드 (공책 한 권 내민다) 필요할 때마다 읽어 보고 참고하세요.

경성 (열어 보고) 뭐야, 로봇처럼 도색하는 법?

프라메이드 늘 실수하시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세세하게 적어 놓았습니다.

경성 너 이러다 책 내겠다. (닥치는 대로 공구 찾으며) 일단, 급한 대로 드라이버랑, 멀 탭이랑 또 뭐가 필요하지? 직소 같은 건 필요 없겠지? 아 인두가 필요하려나? 집에 인두가 있나?

프라메이드 저를 고장 내시려는 겁니까?

경성 야, 내가 이래 봬도 학교 다닐 때 과학경시대회는 죄다 휩쓸었거든? 이과를 가야 됐는데, 문과를 가서 이 모양 이 꼴이지. 도에서 하는 대회까지 출전했던 사람이야 나.

프라메이드 ….

경성 왜 못 믿겠냐?

프라메이드 프라모델을 사겠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경성 그래? 잘 됐네. 혹시 가격 내렸냐?

프라메이드 조금.

경성 너 임마 나랑 상의도 없이.

프라메이드 기쁘지 않으십니까?

경성 응? 뭐가?

프라메이드 오경성님께서 바라던 대로, 처음으로 프라모델을 완성하고, 판매까지 하게 됐습니다. 기쁘지 않으십니까?

경성 응? 어… 그래, 기쁘지. 엄청 기쁘다야. 우리 기념으로 오늘은 맛있는 거 해먹자. 축하파티하자!

프라메이드 ….

경성 (상자 뒤지며) 근데, 너 배달될 때 충전 케이블 같은 거 진짜 못 봤어? 청소하다 모르고 버린 거 아냐? 너 전에 여기 있던 케이블 뭉치 안 버렸지? 너한테 맞는 케이블이 있을지도 몰라, 케이블은 다 거기서 거기라 안 되면 세운상가 가서 맞는 거 있나 보고 하나 사오지 뭐. 아, 여깄다. (엉켜 있는 케이블 뭉치 꺼내 푼다)

프라메이드 저는 시판 전 시범사용으로 만들어진 프라메이드입니다. 충전식으로 출고되지 않았습니다.

경성 그럼 배터리 자체를 갈아야 되는 건가? 배터리는 어떤 거 쓰는데? 자동차용으로 사면 되나?

프라메이드 배터리는 내장형으로 교환이 불가합니다.

경성 너 인간을 너무 띄엄띄엄 본다. 프라메이드가 세상에 출시되면 한 대에 돈이 얼만데 널 충전도 안 되는 일회용 고물로 만들었겠냐?

프라메이드 저는 시판 전 시범사용으로 만들어진 프라메이드입니다. 제 유통기한은 전력소비에 따른 시간입니다.

경성 (프라메이드 등판 살피며) 야 나 여기 좀 열어봐도 되냐? 여기가 하드 아니야?

프라메이드 저를 해체하시려는 겁니까.

경성 맥가이버 같지 않냐? 너 맥가이버 누군지 알아?

프라메이드 배터리가 다 된 로봇은 방전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경성 괜찮긴 뭐가 괜찮아 임마. 너 하나도 안 괜찮아 보여.

프라메이드 오경성님은 괜찮으십니까.

경성 아이씨, 금방 전화줄 것처럼 하더니, 왜 안와. (다시 전화 건다) 예, 방금 프라메이드 충전 때문에 전화 걸었던 사람인데요. 담당자랑 아직 연락 안 됐나요? 지금 정말 급하거든요. 배터리가 오프로도 안 남았어요. 예, 연락 닿는 대로 빨리 좀 전화 주십쇼. (전화 끊고) 잠깐 자리를 비웠다나 봐. 좀만 더 기다려보자. 금방 전화 준다고 했으니까, 혹시 그 전에 방전되더라도 겁먹지 말고. 알았지?

프라메이드 완성한 프라모델들은 이쪽 상자에 넣어두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급할 때마다 판매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경성 야, 수고했다. 수고했어.

프라메이드 (봉투 뭉치 내밀며) 이력서입니다. 오래된 것들은 버리고 새로 만들어 봤습니다. 사진과 나이는 공란으로 해두었으니,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세요.

경성 뭘 이런 것까지.

사이.

프라메이드 저는 그동안 오경성님의 프라메이드-가사도우미로서 오경성님의 가사에 도움이 되었습니까?

경성 그래, 덕분에 송장 안 치르고, 사람답게 살고 있다.

사이.

 

프라메이드 저는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경성 내가 홈페이지에 후기 팍팍 올려주기로 했잖아. 회사에 잘 얘기해 준다고. 프라메이드는 완벽한 우렁각시다. 개인 비서이자, 헬스트레이너,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이자 가족입니다. 당신 삶의 조력자, 최고의 룸메이트, 당신 삶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죽는 날까지 프라메이드와 함께하세요! 이 정도면 되겠냐?

프라메이드 ….

경성 왜? 감동받았냐?

프라메이드 로봇은 감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경성 아이고, 그러세요.

프라메이드 하지만 그 말이 갖고 있는 의미는 알고 있습니다.

경성 ….

프라메이드 감사합니다.

사이.

경성 뭘, 내가 더 고맙지.

사이.

프라메이드 매일 감자에 물주는 것 잊지 마십쇼.

경성 어.

프라메이드 금붕어 제시간에 밥 주는 거 잊지 마십쇼. 정량을 지키셔야 합니다.

경성 알아 임마.

프라메이드 편의점 도시락이나 인스턴트 음식은 안 됩니다. 매일 식사 후 40분 이상 운동하세요.

경성 잔소리는.

프라메이드 흰 빨래와 검은 빨래는 구분하고, 섬유유연제를 잊지 마세요. 여자들은 향수보다 섬유유연제 향을 더 좋아합니다.

경성 별걸 다 참견한다.

프라메이드 외롭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이.

경성 안 되겠다. 나 이 앞에 전파사 가서 건전지, 아니다, 혹시 모르니까 카센터 가서 배터리라도 좀 사올게. 금방 올 테니까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어. 알았지?

집을 막 나서려는데, 전화벨 소리.

경성 왔다. 왔다. 왔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전화 받는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제가 오경성인데요. 그 프라메이드 충전 그거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지금 방전되기 직전이라- 네? 뭐라구요? 1차 합격이요? 그게 무슨. 방금 프라모델 전문회사 ‘프라프라’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네, 네, 네, 제가 그 오경성 맞는 거 같은데요? 아, 네. 아, 감사합니다. 네, 네, 가능합니다. 네, 네, 그날 뵙겠습니다!

전화 끊는다. 어리둥절한 경성.

경성 야, 방금 니네 회사에서 전화 왔는데, 나보고 1차 서류 합격했다고, 면접 보러 오라는데?

프라메이드 축하드립니다.

경성 너 혹시 나 몰래 내 이력서 넣었냐?

프라메이드 꼭 합격하실 겁니다.

경성 야, 넣으면 넣는다고 말을 해야지 임마. 본사 정규 채용이라는데? 어쩌냐? 나 어쩌냐? 나 뭐 어떻게 해야 되냐? 너가 좀 도와줘야겠다. 니네 회사에 대해서 너는 잘 알거 아냐.

프라메이드 오경성님 그대로도 충분합니다.

경성 너 지금 무책임하게 그게 무슨 말이야. 2차 합격될 때까지, 아니 최종 합격될 때까지, 니가 나를 끝까지 관리해 줘야지. 그게 너의 할 일이자 의무 아니야?

프라메이드 제가 없더라도 지금처럼-

경성 뭐? 제가 없더라도 지금처럼? 아, 알았다. 너 인마, 그래서 방전되고 싶었구나. 나 책임지기 싫어서. 나 취직 안 되면 니 탓할까 봐 책임지기 싫어서 그러는 거지.

프라메이드 제가 없어도 지금처럼 프라모델에 대한 애정과-

경성 왜 나같이 무능한 놈 가사일 하려니까 자존심 상해서 못해먹겠냐? 내가 너 방전될까 봐 집안일 다 해주고 그러니까 아주 편안하고 좋았나봐? 나 안 해. 집안일을 내가 왜 해, 밥을 내가 왜 차려 먹어, 나 취직도 안 하고, 평생 편의점 폐기음식 먹으면서 죽어갈 거야. 어때 볼만하겠지?

프라메이드 지금처럼 프라모델에 대한 애정과 열정, 그리고 진심을 가지고 다, 닥, 다, 가, 다가가, 가시, 면

경성 야, 왜 그래.

프라메이드 얼마드드든지 합기기어억글 하시르르를거 락….

경성 야, 우렁이! 야, 임마!

프라메이드 자 아 알….

경성 야, 정신차려, 너 그냥 이렇게 가면 안 되지.

프라메이드 최서느으르드아아하.

경성 왜 끝까지 살아보려는 의지가 없어!

프라메이드 며언 꾸우으으으므을 이루우우울스우우….

경성 그냥 이렇게 갑자기 가면.

프라메이드 미미밋고이이이음니.

경성 저기, 너무 놀랄 거 없어. 회사에서 금방 전화 올거야. 내가 금방 충전해 줄 테니까, 아니다. 내가, 내가 지금 회사에 다시 전화걸 테니까. (다시 전화 건다) 여보세요? 네, 제가 아까도 전화 드린 사람인데요. 프라메이드 충전 때문에 전화 달라고 했는데, 연락이 없어서요. 담당자랑 통화할 수 있도록 직통 전화번호를 좀 알려주세요. 지금 이 친구 완전히 방전 직전이거든요? 뭐? 기다려요? 아니, 사람이 죽는데도 이렇게 기다리게 하실 겁니까? 로봇이라고 무시하는 거예요? 당신 이름 뭐야? 아까부터 느꼈는데, 자기 회사 제품에 관심도 애정도 열정도 없고 말이야. 그런 안일한 정신으로 일하면서 회사에서 다달이 월급 받으면 양심에 찔리지 않나? 어?

프라메이드 (몸에서 종료음 울린다) 스위치 오프 더 파워. 배터리 차지 오브 낫띵. 굿바이 휴머노이드 월드 인 코리아. 땡큐.

 

프라메이드의 몸에서 ‘휴머노이드 프라메이드의 시범사용을 종료합니다. 이용해 주신 고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리며, 프라메이드의 방문 수거를 위해 프라프라 본사 전화 일오공공 공공칠삼 혹은 홈페이지 고객센터에 원하시는 자택 방문 일자를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자의 안내멘트 들리더니, 이내 프라메이드의 눈에서 불 꺼지면서, 천천히 고개 떨군다.

 

경성 여자 목소리 되네. 안 되는 척하더니.

 

경성, 처음과 사뭇 달라진 방을 둘러본다. 자신이 어지럽힌 물건들을 제자리에 놓는다. 프라메이드의 손에서 도색하고 있던 프라모델을 떼어놓는다. 프라메이드가 완성한 프라모델들을 책장에 진열하고, 그가 준 봉투뭉치를 본다. 꽤 많은 양이라 두툼하고 묵직하다.

 

경성 너, 배터리 방전되도록 밤새 이거 쓰고 있었던 거냐? (봉투 열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꺼내 읽기 시작한다.) 평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꿈을 귀사에서 펼치고자 하는 열망이 (프라메이드 본다) 감히 허락도 없이 니 맘대로 내 소개를 하다니…. (다시 읽는다) 평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꿈을 귀사에서 펼치고자 하는 열망이, 남들보다 작고 왜소했던 오경성 어린이가 도내 최연소로 최단기간 태권도 품띠 2단을 딸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조명 서서히 암전.

막.

<끝>
2015-01-01 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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