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 조형미 깃들었는데… 민화가 서민 그림?

궁중 조형미 깃들었는데… 민화가 서민 그림?

김기중 기자
김기중 기자
입력 2018-07-26 17:42
수정 2018-07-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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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강우방 지음/다빈치/536쪽/4만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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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현이 그린 조선시대 민화 ‘까치 호랑이’. ‘민화’ 저자 강우방은 호랑이 무늬가 영기를 품은 문양을 뜻하는 영기문으로 표현됐고, 꼬리 끝과 어깨, 얼굴에 생명력을 응집한 크고 작은 보주가 가득하다고 봤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과 서민을 풍자하는 그림이라 알려졌지만, 4신 가운데 하나인 ‘백호’에 가깝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신재현이 그린 조선시대 민화 ‘까치 호랑이’. ‘민화’ 저자 강우방은 호랑이 무늬가 영기를 품은 문양을 뜻하는 영기문으로 표현됐고, 꼬리 끝과 어깨, 얼굴에 생명력을 응집한 크고 작은 보주가 가득하다고 봤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과 서민을 풍자하는 그림이라 알려졌지만, 4신 가운데 하나인 ‘백호’에 가깝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민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한 민족이나 개인이 전통적으로 이어온 생활 습속에 따라 제작한 대중적인 실용화’. 그리고 이렇게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민속에 얽힌 관습적인 그림이나 오랜 역사를 통해 사회 요구에 따라 같은 주제를 되풀이해 그린 생활화를 말한다. 비전문적인 화가나 일반 대중들의 치졸한 작품 등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서민 그림’은 오해… 조선 궁중 미술양식 담겨

‘비전문적인 화가의 치졸한 작품’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민화는 순수미술보다 한 수 아래 그림으로 여겨진다. 전문 화가가 그린 그림이 아니어서 작품성이 떨어지고, 그저 서민들이 즐기는 수준밖에 안 되는 그림이라는 식의 설명이 일반적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경주박물관장 등을 지내며 한국 미술을 40년 넘게 연구한 미술사학자 강우방은 신간 ‘민화´에서 이런 의견을 반박한다. 저자는 민화 가운데에는 화원이나 화승 출신 전문 화가가 그린 그림이 많고, 작품성 역시 순수 미술보다 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고구려 무덤 벽화, 고려·조선의 불화, 궁중 미술에 이어진 조형 양식과 상징 구조가 민화에 고스란히 담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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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병을 그린 민화 ‘만병’은 영기문으로 가득한 그림이다. 탁자에는 여의두문이라 불리는 문양이 사용됐고, 만병 중간에 ‘완성’, ‘공경’을 뜻하는 매듭을 묶었다. 매듭 아래에 영기문이 가득하고, 위로는 특이한 형태의 병목과 주둥이를 거쳐 보주를 뜻하는 꽃이 피어난다. 이런 형태는 2세기 아마라바티에서 출토한 석조 만병과 매우 닮았다. 저자는 한국의 만병 형태가 인도에서 유래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면서, 초자연적 탄생, 종교적 탄생을 뜻한다고 분석한다. 보나장신구박물관·아마라바티 고고학박물관 소장
꽃병을 그린 민화 ‘만병’은 영기문으로 가득한 그림이다. 탁자에는 여의두문이라 불리는 문양이 사용됐고, 만병 중간에 ‘완성’, ‘공경’을 뜻하는 매듭을 묶었다. 매듭 아래에 영기문이 가득하고, 위로는 특이한 형태의 병목과 주둥이를 거쳐 보주를 뜻하는 꽃이 피어난다. 이런 형태는 2세기 아마라바티에서 출토한 석조 만병과 매우 닮았다. 저자는 한국의 만병 형태가 인도에서 유래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면서, 초자연적 탄생, 종교적 탄생을 뜻한다고 분석한다.
보나장신구박물관·아마라바티 고고학박물관 소장
저자는 작품의 구도라든가 채색의 대비가 어떻다, 혹은 여백의 미가 있느니 없느니 식의 이야기는 아예 하지 않는다. 오로지 민화 속 조형 언어에 귀 기울인다. 자신이 개발한 ‘채색분석법’을 통해 민화의 선을 옮겨 그리고 한 단계씩 다시 채색하며 화가의 창작 과정을 좇아간다. 그리고 자신만의 민화 이론인 ‘영기화생론’(靈氣化生論)을 내세운다. 우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성한 기운인 ‘영기’가 가득 차 있는데, 민화가 이러한 영기를 선과 면으로 구체화한 영기문으로 표현했다는 주장이다. 영기문이 선과 면을 넘나들고 변주하면서 온갖 조형을 만들고, 이런 조형에서 다시 영기가 발산해 우주의 끊임없는 순환을 이룬다는 게 이 주장의 핵심이다.

●우주의 기운 ‘영기’ 일정한 패턴으로 배치

예컨대 호랑이를 가운데에 배치하고 주변에 까치가 울어대는 민화 ‘까치 호랑이’를 보자. 이 그림에 관해 호랑이의 줄무늬가 호랑이의 것인지, 표범의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자세히 보면 호랑이 무늬는 일정한 패턴을 보인다. 저자는 이런 무늬가 영기를 표현한 영기문을 면의 형태로 구현한 것이라 분석한다. 영기가 응집한 동심원 형태의 문양을 ‘무량보주’(無量寶珠)라 부르는데, 실제로 눈과 그 주변, 어깨, 꼬리 등에 둥그런 모양의 원이 촘촘히 박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권위적이고 부패한 위정자들을 비꼬며 조롱하는 까치(서민)와 바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호랑이(양반)의 모습을 풍자했다’는 식의 세간의 주장에도 저자는 “근거 없다”고 반박한다. 이 그림이 새해를 맞아 대문에 붙이는 ‘세화’로 사용된 점, 고구려 삼실총의 백호와 비슷한 문양이 들어간 점, 용의 여의주와 같은 보주가 상당수 배치된 점을 들어 사실상 민화 속 호랑이가 4신 가운데 하나인 ‘백호’에 가깝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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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기 아마라바티에서 출토한 석조 만병 보나장신구박물관·아마라바티 고고학박물관 소장
2세기 아마라바티에서 출토한 석조 만병
보나장신구박물관·아마라바티 고고학박물관 소장
책에서는 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까치 호랑이 그림을 비롯해 농촌에서 사용한 농기(農期), 화려한 꽃병을 그린 만병도, 책과 책상 등을 그린 책거리, 조상의 신주를 모신 사당을 담은 감모여재도, 글자에 그림을 그려 유교 윤리를 표현한 문자도 등을 다른 식으로 분석한다. 특히 그림의 배경 장식쯤으로 여겨지던 무늬와 각종 조형을 ‘중심 조형’으로 읽어내 민화 속의 꽃병과 그릇을 ‘만병’으로 본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이와 관련, 기원전 3000년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부터 나타나는 우주목(宇宙木), 생명의 나무 조형을 비교한다.

●일본인이 만들어 쓴 용어 ‘민화’

민화에 이런 고차원의 상징 체계가 들어 있다는 저자의 설명은 정론으로 보기 어렵다. 민화에 관한 우리 연구가 턱없이 부족해 사실은 민화의 범위는 물론이거니와, 정론 역시 아예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는 부끄럽게도 우리가 아니라, 일본과 한국에서 민예 운동을 펼치던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였다. 그가 1959년 민화 두 점에 관한 글을 ‘민예’지 80호에 실으면서 민화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영기문이나 무량보주가 당시 유행하던 문양이었을 수도 있다. 화가에 관한 정보 자체가 거의 없어 전문 화가가 그렸는지, 일반인이 그렸는지도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논란을 넘어 저자의 민화에 관한 상상력과 연구 결과는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민화에 관한 해석은 결국 독자의 몫이지만, 아예 연구조차 없었던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드러내고 민화의 비밀에 한 발짝 다가가도록 해준 저자의 노력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2018-07-27 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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