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떠오르는가… 쉿! 그 입 다물라

누가 떠오르는가… 쉿! 그 입 다물라

입력 2010-05-17 00:00
업데이트 2010-05-17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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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림 교수 극본·연출의 재벌 풍자극 ‘리회장 시해사건’

짐[朕]. 중국 진시황제가 황제를 지칭하는 1인칭 대명사로 정한 단어다. 뜯어볼수록 절묘한 선택이다. 짐의 원래 뜻은 ‘징후’나 ‘조짐’. 언제 어디서든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으나 실체는 쉬이 드러내지 않는, 최고권력의 속성을 함축하고 있다. 권력이란 거기서 풍기는 미묘한 아우라다. 따라서 연극 ‘리 회장 시해사건(큰 사진)’을 말하려면, ‘징후’나 ‘조짐’만으로 얘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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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대사 몇 개만 보면 감은 퍼뜩 온다.

리 회장이 둘째 아들 리정현 상무를 질타한다. “재경부고 청와대고 그것들 다 내 돈 먹고 큰 놈들이야. 첨부터 길을 잘 들여놓아야 해. 전직 관료 나부랭이들 관리하는 거 앞으로 리 상무가 맡으라고.”

‘블루노트 사건’이 터지자 맏아들 리정렴이 리 회장을 비난한다. “온 세상이 다 압니다. 후계구도 만드느라 회사 주식 불법으로 증여한 거, 수시로 엄청난 정치자금 지원한 거, 그거 감추느라 기하급수의 돈봉투 돌리는 거. 온 나라가, 아니 온 세계가 다 압니다.”

블루노트 사건을 청와대가 화끈하게 무마해준 뒤 기분이 흡족해진 리 회장이 말한다. “그 놈의 민주화가 늘 걸림돌이었는데 이번엔 그 민주화가 우릴 살리는구만.”

●법률 자문까지 받아 민감한 대목 3~4곳 삭제

머리에 이름 하나 번쩍 떠오르는가. 쉿! 그 입 다물라. 짐은 절대 발설되어서는 안 되는 ‘조짐’ 혹은 ‘징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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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김광림(작은 사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가 쓰고 연출했다. 맞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 연극 ‘날 보러와요’를 만든 그 사람이다. ‘리 회장 시해사건’은 변호사 법률자문까지 받아 민감한 대목 3~4곳을 삭제하고 올린 공연이다. 김 교수를 ‘추궁’했다. 눙치는 대답이 돌아왔다.

→현실과 지나치게 깊게 얽히면 연극적으로 손해 아닙니까.

-(웃으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모티프는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 양반편에서 따왔어요. 전 주인을 몰락시킨 라이벌 양반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신임을 얻은 뒤 복수하는 어느 하인 얘기예요. 너무 재밌어서 3년 전부터 쓰기 시작했고, 양반 간 경쟁이나 양반과 하인의 수직적 관계를 현대적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기업 간 인수합병(M&A)과 비서 진숙경이라는 캐릭터가 떠올랐어요. 그러다 재벌가 얘기가 된 겁니다.

→극 중 ‘블루노트 사건’은 뭐라 하실 겁니까. 딱 무슨 파일 사건 같은데요.

-그것도 미국 어느 주에서 위락시설 지으면서 생겼던 실제 사건에서 따온 겁니다. 그 사건에 ‘블루노트’라는 것이 실제 등장해요. 우리나라는 너무 좁다 보니 조금만 비슷해도 직접적으로 대입되는 것 같아요.

→블루노트 사건 뒤 리 회장이 그 유명한 독수독과론을 읊는데도요?

-나라가 좁다 보니 다 그 얘기처럼 보이는 것 뿐이라니까요. 하하. (탁 하면 척 하고 알아먹으라는 듯) 그리고 그건 뭐… 다 아는 얘긴데 별달리 특별하달 수 있을까요.

→그러면, 법률자문 끝에 지웠다는 내용을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그건…, 법에 걸려서 안 될 겁니다. 이미 지운 건데. 하하하.

→리 회장을 지나치게 악마화한 거 아닙니까. 많이 먹기만 하고 배설하지 않아서 피똥이나 싸대는 존재로 그려지고.

-그 설정도 임꺽정에서 따온 거에요. 그러니 홍명희가 대단한 선생이죠. 동서고금을 통틀어 큰 재산, 큰 권력에는 항상 문제가 있어왔습니다. 부와 권력이란 게 속성상 그리 아름답지 않잖아요.

→그러면 제목은 왜 ‘살해’가 아닌 ‘시해’인가요.

-그 사람들 입장이에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개인적으로 재벌가 사람과 접촉해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시해라고 생각할 겁니다.

후련한 직설화법과 함께, 연출과 무대도 눈여겨볼 만하다. 한국 전통 연희의 현대적 해석을 지향하는 극단 우투리의 작품답게 큰 춤판이 두어번 벌어지는데, 여기 나오는 동작은 ‘양주별산대’와 ‘한국무용 제동작 24가지’를 응용한 것이다. 춤만 익히는 데 하루 8시간씩, 석 달간 연습했단다. 그래도 김 교수는 “연기하는 배우들이다 보니 안무가의 요구를 100% 소화해내지 못했다.”며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작품 중간에 큰 춤판… 조주선 명창의 판소리 곁들여

서울연극제 기간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공연(5~9일) 때는 아예 사각형 무대를 만들어 마당놀이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오는 19일부터 대학로 미마지아트센터 눈빛극장으로 옮겨 다음달 6일까지 관객과 다시 만날 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공간 등의 문제로 평면 무대로 바뀌게 됐다.”며 김 교수는 아쉬워한다. 이 바람에 배우들의 무대 등장과 동선을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배우들로서는 두 번 준비하는 셈이 됐다. 극 사이사이 4계절에 빗대 인생무상을 노래하는 판소리의 주인공은 조주선 명창이다.

극은 비슷한 장면과 대사가 반복되면서 약간씩 살을 덧붙이는 식으로 진행된다. 관객들의 기억과 기대감을 자극해 가며 극의 긴장도를 끌어올리는 기법이 흥미롭다.

또 한 가지 얘깃거리는 리 회장으로 나오는 배우가 세풍(稅風) 사건의 주역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이라는 점. 경기고 연극반 출신 연극인 모임인 화동연우회 소속으로 캐스팅됐다. 예술 한번 하려다 아버지에게 뺨 맞고 늙어서야 뒤늦게 무대에 올랐다는데, 연기가 능청스럽다. (02)3272-2334.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2010-05-17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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