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 “오판 점철된 한국전, 최대패자 스탈린”

키신저 “오판 점철된 한국전, 최대패자 스탈린”

입력 2011-05-18 00:00
업데이트 2011-05-18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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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한국전 참전 이유, 현재 中대북정책 판단에 유의미”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17일 시판된 저서 ‘중국에 관하여’(On China)를 통해 공산주의 체제를 구축한 마오쩌둥의 대외정책을 처음 드러내보인 계기로서 한국전쟁을 분석했다.

회고록이라기보다는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분석하면서 서방에 대한 중국의 외교정책사를 짚은 역저이다.

현대사를 바꾼 1972년 미.중 국교정상화의 막후주역이었기 때문에 키신저는 2차 대전후 미국의 대중(對中) 관여(engagement) 정책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미간의 협력적 관계 구축이 세계 안정과 평화에 필수불가결하다는 현재 그의 인식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중.소의 기싸움과 미국의 계산 = 1950년 김일성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도 중국의 한반도관을 비롯, 대외정책과 소련 스탈린의 대외정책이 어우러진 산물이었다고 평가했다. 다만 한국전쟁은 미국, 소련, 중국의 3강국이 서로 잘못된 전략적 판단과 계산이 뒤섞이면서 전개됐다고 키신저는 진단했다.

키신저는 1949년 12월16일 마오와 스탈린의 첫 모스크바 정상회담을 묘사하면서 “두 공산주의 독재자는 쉽게 협력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며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는 과정에서 스탈린이 중국에 그 책임과 부담을 떠넘기며 궁극적으로 중국의 대(對) 소련 의존도를 높이려는 의도를 짚었다.

키신저는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배제해 김일성의 남침을 촉발시킨 요인으로 알려진 1950년 1월의 ‘애치슨 연설’을 미 행정부가 중국과 소련을 이간질시키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고 강조하며, 새 미.중 관계를 구축하려는 발상이라는 차원에서 분석했다.

또 김일성이 남침 승인을 얻기 위해 1949년과 1950년초 분주히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오갈 무렵 중국과 소련의 태도를 자신들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고, 상대방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한 치열한 전략.전술 싸움 차원에서 분석했다.

◆미.중.소의 상호 전략오판 = 키신저는 특히 한국전쟁의 모든 주체들이 상대방의 전략을 모두 잘못 판단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스탈린과 김일성은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고,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남침후 미국의 유엔군 파견결정과 중국-대만 양안 중립화를 위한 미 태평양 함대 파견을 “미국이 중국 본토와의 전면전을 고려한다”고 우려했으며, 미국은 “중국의 한국전 참전은 중국의 역량을 넘어선 것”이라고 잘못 예측하는 오류들이 이어졌다는 것.

키신저는 “미국과 중국은 상대방의 전략적 계산에 대한 오해로 충돌을 향해 나아갔다”고 강조했다.

◆美 참전초기 전략부재 = 키신저는 미국의 경우 한국전이 발발했을 때 한반도의 군사적 전략이 부재했다고 실토했다.

한국전에 개입할 경우 성공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북한군을 38선이북으로 물리치는 것까지가 목표인지, 재침략을 못하도록 북한군을 궤멸시키는게 목표인지, 한반도 통일을 시키는게 목표인지 좌표가 없었다는 것.

키신저는 “미군의 한국전 개입 초기 이런 문제가 논의됐다는 근거는 없다”며 “단지 군사적 작전의 결과가 정치적 판단을 결정하도록 하는 양상으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결국 맥아더 사령관이 이끄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 트루먼 행정부는 한반도가 통일될 때까지 군사작전을 계속한다는 입장을 택했다고 키신저는 설명했다.

이 같은 입장은 중국이 북.중 국경지대를 따라 미군이 주둔하는 것을 수용할 것이라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었지만, 미국의 전제와는 달리 중국은 일본의 만주침략이라는 역사를 바탕으로 국경지대의 미군 진주를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키신저는 분석했다.

◆中 참전 이유는 北붕괴방지 = 마오쩌둥이 한국전에 참전한 이유도 미군이 1950년 10월 38선 이북을 넘어 두만강으로 북진한데 따른 것이라는 전통적인 분석과 달리 김일성의 남침후 미군이 곧바로 참전을 결정한 때부터 마오쩌둥은 중국군의 전쟁개입을 계획했다고 강조했다.

키신저는 “마오는 미군의 38선 이북 북진전부터 중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북한이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했고, 북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며 “미군의 두만강까지의 진출을 막는 것은 부차적인 요소였다”고 분석했다.

키신저는 “중국은 미국의 전술적 책략에 대한 반응이나 38선을 지켜야 한다는 법적 근거때문이 아니라 주의깊게 고려된 전략적 계산을 바탕으로 한국전에 개입했다”며 “중국의 참전은 현실화되지 않은 위험에 대응하는 선제적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키신저는 “한국전 참전은 중국이 장기적 측면에서 한반도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지 인식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는 현대에 와서도 보다 유의미한 측면”이라고 말했다.

현재 중국의 대북(對北) 정책을 고려하는 요소들이 과거 한국전 참전 당시 중국의 전략적 계산과 연결된다는 키신저의 설명이다.

◆미.중.소의 한국전 득실과 중.소 관계 악화 = 키신저는 한국전쟁을 결산하며 “전쟁에 참여한 어느 곳도 그들의 목표를 온전히 성취하지 못했다”고 총평하면서 미국과 중국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모두 있지만 “최대의 패배자는 스탈린”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은 북한의 침공을 격퇴하고 신생 동맹국을 지켜내는 성과를 거뒀지만, 중국으로 하여금 강대국 미국과 싸워 버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고, 전쟁수행과정에서 정치적, 군사적 목표를 조화시키지 못하고 국내적 논란을 초래함으로써 10년후 베트남전에서 비슷한 딜레마를 반복했다고 키신저는 분석했다.

중국의 경우는 “한반도를 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당초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신생 공산주의 중국의 위상과 군사력, 존재감을 과시하는 계기가 됐고,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에 중국의 리더십을 확보하는 성과를 얻었다는 것.

키신저는 “김일성의 남침요구를 승인하고 마오쩌둥의 개입을 재촉했던 스탈린이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전 최대의 패자”라며 목표했던 한반도 공산통일에도 실패했고, 참전을 통해 중국의 소련 의존도를 높이고 장악도를 강화하려는 의도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마오는 스탈린의 속셈과는 달리 한국전을 계기로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에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한국전 종전과 더불어 중.소 관계는 더욱 악화됐고 중국은 소련과는 다른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걷게 됐다고 키신저는 분석했다.

키신저는 “그후 10년이 지나지 않아 소련은 중국의 주요한 적수가 되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동맹의 변화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1971년 7월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자신이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하고 이어 미.중 국교정상화로 이어지는 역사를 염두에 둔 언급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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