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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줄날줄] 양(羊)/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양(羊)/서동철 논설위원

입력 2014-12-31 17:12
업데이트 2015-01-01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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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 평화와 순종의 아이콘이지만, 일단 화가 나면 참지 못하는 성격도 감추고 있다고 한다. 한자의 양(羊)은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리고 꼬리를 늘어뜨린 모습의 상형문자다. 이 글자가 맛있을 미(味), 아름다울 미(美), 상서로울 상(祥), 착할 선(善), 옳을 의(義)로 변주가 이루어졌으니 양의 품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 양과 염소를 분명하게 구분 짓지 않았다. 양의 해에 태어난 사람을 양띠라고도 하고, 염소띠라고 부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산양(goat)와 면양(sheep)을 명확하게 구분해 부른다. 생물학적으로도 산양과 면양은 다른 속(屬)으로 염색체 수도 다르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 옛 기록에는 그저 양(羊)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 많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도 ‘다산필담’에서 ‘산양, 즉 염소를 양이라고 잘못 부른 사례가 많아 분간하기 어렵다’고 했다. ‘목민심서’에서는 ‘우리는 산양을 염소라 하고, 고(?) 또는 하양(夏羊)이라고 면양과 구별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보면 수염 염(髥)자를 쓴 염소(髥牛)라는 이름에서는 외모의 특징이 드러난다. 고(?)는 고트(goat)를 음차했을 것이다.

야생 면양의 가축화는 아시아의 서부 고원지대와 중앙아시아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이란고원의 유적에서 발견된 면양의 뼈는 BC 7000년 것으로 측정됐다. 산양의 가축화를 보여 주는 최초의 증거는 BC 6500년으로 추정되는 메소포타미아의 제리코 유적에서 나왔다. BC 6000년 안팎 카스피해 유적에서도 출토됐으니 역시 이란 북부 지역이다.

고대 한반도에서 양의 존재는 미미하다. 1세기 유적인 김해 패총에서는 멧돼지와 사향노루, 사슴, 소, 말의 뼈가 대거 출토됐지만 양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 후한시대(25~219) 사전인 ‘석명’(釋名)에서는 삼한에는 중국에서 볼 수 없는 양이 있으며, 육포를 만들어 먹는다고 적었다. 한반도 산양 사육의 기원을 짐작하게 해 주는 기록으로 받아들여진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양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책인 ‘서기’에는 599년 낙타 1두와 노새 1두, 양 2두, 흰꿩 1쌍을 백제로부터 받았다는 대목이 보인다. 일본은 이것을 양 사육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로 내려오면 예종 11년(1116) 거란족의 요나라 유민이 양 수백 마리를 몰고 투항했는데, 이것이 면양의 한반도 최초 유입 기록이다.

이후 양은 상서로운 짐승으로 대접받았다. 특히 양꿈은 길몽으로, 이성계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그가 초야에 묻혀 있던 시절 꿈속에서 양을 잡으려 하자 뿔과 꼬리가 모두 떨어져 나갔다. 이야기를 들은 무학대사는 곧 왕위에 오르리라고 해몽했다. 양(羊)에서 뿔과 꼬리를 떼니 곧 왕(王)이 된다는 것이었다. 을미년 양띠해가 밝았다. 우리 국민 모두 양꿈 꾸고 소원 성취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2015-01-0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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