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甲과 乙/곽태헌 논설위원

[씨줄날줄] 甲과 乙/곽태헌 논설위원

입력 2010-08-04 00:00
업데이트 2010-08-04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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갭(GAP)은 미국의 대표적인 패션 브랜드다. 지난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1개의 매장으로 출발했다. 성인남녀 의류, 캐주얼 의류, 남녀 어린이 의류, 유아 의류, 액세서리가 주로 팔리는 상품이다.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일본, 독일 등 전 세계에 4000개가 넘는 갭 매장이 있다. 물론 한국에도 매장이 있다. 갭을 즐겨 입는 어떤 중소기업인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중소기업인이 갭을 입는 이유는 갑(甲)을 한 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한다(GAP의 발음을 갑으로 비유한 것). 대기업에 당한 중소기업인의 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대기업은 갑, 중소기업은 을(乙)이다. 갑은 부탁받는 쪽, 을은 부탁하는 쪽을 말한다.

요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문제, 일부 대기업의 횡포 등이 거론되면서 갑과 을의 관계가 새삼스러울 정도로 부각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기업인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현대중공업, SK텔레콤, KT, 한국전력을 비롯한 주요 공기업 등은 국내에서는 갑 중의 갑으로 꼽힐 만하다. 백화점은 왕이고 입점업체는 하인이다.

하지만 갑과 을의 관계라는 것도 상대적이다. 유통업체가 막강 파워를 과시하면서 삼성전자, LG전자도 대형마트와의 관계에서는 을이다. 대기업(기업인)도 정부(관료), 정치권(정치인)에 비하면 을이다. 요즘 대기업들이 정부의 압력에 따라 하루가 멀다하고 중소기업과의 상생대책을 내놓는 게 갑과 을의 관계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던 현대건설도 확실한 갑이었으나 정부, 정치권에는 을이었다. 어느 날 이 대통령이 CEO 시절 퇴근한 뒤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갑이 전화를 걸어왔다. 다짜고짜로 어느 장소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할 수 없이 그 장소에 갔다. 저녁 값을 계산하라는 갑의 전화였다고 한다.

돈 빌리기 힘든 시절, 기업의 금고에 돈이 없던 때에는 은행이 두말할 것도 없이 갑이었다. 외국에서 돈을 조달하기 힘든 시절, 외자를 쓰는 게 특혜 중의 특혜였던 때에는 산업은행은 갑 중의 갑이었다. 이제는 돈을 많이 번 기업이 갑이고 은행은 을이다. 갑과 을은 영원한 것도 아니다. 영원할 수도 없고 영원해서도 안 된다. 도요타 사태가 터진 이유 중 하나로 하도급 업체를 쥐어짠 게 꼽힌다는 점을 소위 갑들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갑이라고 목에 힘 주고, 힘 있다고 거드름 피우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다는 걸 왜 모를까.

곽태헌 논설위원 tiger@seoul.co.kr
2010-08-04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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