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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현대 넘나들며 판타지로 재탄생한 흥보가…국립창극단 ‘흥보展’

전통과 현대 넘나들며 판타지로 재탄생한 흥보가…국립창극단 ‘흥보展’

허백윤 기자
허백윤 기자
입력 2021-09-17 18:57
업데이트 2021-09-2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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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공연

국립창극단 ‘흥보展’.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 ‘흥보展’.
국립극장 제공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제비들. 러시아에서 날아온 흰털발제비, 중국에서 온 청꼬리제비, 일본에서 온 귀제비. 그리고 한국에서 온 흰고깔제비. 제비나라에 모인 제비들은 저마다 머문 땅에서 겪은 일들을 털어놓는다. 기후위기, 지진, 해일 등 자연재해, 팬데믹. 결코 녹록지 않은 삶을 견디고 돌아와 시름을 놓는 게 꼭 우리 모습 그대로다. 그리곤 다리에 오색실을 매고 절뚝거리던 흰고깔제비가 자신이 머물던 삼도 어름 놀보 형제네로 이야기를 이끈다.

국립창극단이 지난 15일부터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선보이고 있는 ‘흥보展(전)’은 이렇게 판타지 가득한 제비나라로 시작한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무대에서 제비들은 지금 이 시대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토로하며 환상과 현실을 오간다. 누구나 다 알고 있을 법한 흥보 놀보 이야기가 시작부터 색다르다.
국립창극단 ‘흥보展’.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 ‘흥보展’.
국립극장 제공
흰고깔제비가 전하는 흥보와 놀보 이야기는 모두에게 익숙하다. 오장육부에 심술보까지 단 놀보의 심술부터 흥보를 쫓아내는 대목, 누더기를 입고 배고프다며 울어대는 자식들, 제비에게 얻은 박씨가 자라 실근실근 박을 타는 대목 등 친숙한 이야기 흐름 속에 만정제 흥보가를 중심으로 판소리 대목 그대로가 가득 담겼다. 그러면서도 마냥 고개를 조아리며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는 흥보가 아닌 놀보 부부에게 있는 대로 대들며 악이라도 써보고 제 발로 집을 박차고 나오는 흥보 부부, 육개장이고 호박죽이고 당장 배를 채울 것을 요구하는 걸 넘어 루이비통, 에르메스에 대한 욕망까지 서슴없이 드러내는 모습이 웃음을 주면서도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느낌을 준다.

친근한 동화 같은 이야기를 더욱 새롭고 감각적으로 읽히게 하는 것은 무대 미술이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 미술감독, 현대무용가 안은미의 무대디자이너, 평창동계패럴림픽 개·폐막식 미술감독 등 다방면으로 활동한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최정화가 총괄한 무대에는 커다란 LED로 화려하고 세련된 그림들이 배경이 된다. 작품 제목처럼 공연과 전시를 함께 보는 경험도 남다른데 눈이 부실 만큼 쨍한 형형색색으로 채운 추상적인 영상과 다채로운 오브제가 민속성이 가장 짙은 흥보가 속 이야기와 아우르며 하나의 판타지로 꾸며낸다. 한국의 웨딩홀 기둥을 모방해 한국사회의 급격한 근대화와 서구화를 읽어낸 최 감독의 기둥 시리즈 ‘세기의 선물’도 LED 영상을 통해 놀보네 집 배경으로 넣었다.
국립창극단 ‘흥보展’.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 ‘흥보展’.
국립극장 제공
창극의 독창적 성격을 정립하는 데 기여한 연출가 허규(1934~2000)의 ‘흥보가‘(1998)를 원작으로 한 이번 작품의 극본과 연출은 판소리에 조예가 깊은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맡았다. 청년시절 박초월 명창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처음 배운 판소리가 흥보가였다고 한다. 흥보가에 담긴 전통의 가치와 재미, 감동을 최대한 원형대로 유지하되 틈틈이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녹여내 제비나라를 넣는 설정을 비롯해 참신한 흥미를 더했다. 작품이 전통과 현대 이야기를 넘나들 수 있었던 것도 흥보가가 이야기하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와의 갈등,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소망, 형제나 가족 간의 미움과 용서, 극도의 결핍과 과잉까지 모든 이야기가 지금도 존재하고 시대를 관통하는 요소들이라고 보고 자연스레 현재의 이야기를 녹인 비결로 읽힌다. 그는 “판소리 흥보가가 고달픈 세상살이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욕망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면서 “2021년 창극 ‘흥보展’은 다양한 인간의 면면을 드러내며 한 번쯤 판타지를 꿈꾸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작창을 맡은 안숙선 명창도 만정제를 비롯해 여러 창본에서 뽑은 소리에 우리 이야기를 담아 좀더 새롭게 엮었다고 설명했다. 작곡가 박승원·최성은·김창환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태평소, 아쟁, 소리북에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 등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음악으로 판소리의 멋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한국적 창작무용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 채향순의 안무도 재치를 더하고 특히 제비들의 웅장하고 화려한 군무 등 아름다운 몸짓들로 완성도를 높인다. 국립창극단 전 단원을 비롯한 59명 출연진의 무대를 꽉 채우는 소리의 에너지도 대단하다. 다양한 캐릭터로 매력을 선보인 김준수가 흥보로, 선 굵은 연기가 돋보이는 윤석안이 놀보를 노래하며 실감나는 이야기를 전한다. 공연은 21일까지 이어진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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